한줄 詩

서른 살의 박봉 씨 - 성선경

마루안 2012. 12. 30. 06:26



서른 살의 박봉 씨 - 성선경
-첫눈, 혹은 세모에 대하여



몇 가닥의 새치를 기르며 늙어가겠다
첫 눈을 맞으며 외투 깃을 세우고
-사랑의 아픔 따위는 통속적이다-
거짓말하지 않으며
살이 부러진
비닐우산을 함께 받으며
울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함께 울어주며 밤새우겠다
그래,
한두 송이의 눈발을 맞으며
가만히 눈감아 생각해보면
세상에 그럴듯한 사연 하나 간직하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저토록 눈은 내리고
잊혀진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다 되돌아보면
아 날은 저물어 쓰러진 눈발같이
세상은 다시 아득하구나, 목숨까지
눈발로 휘날리다 눈발로 내려앉는 것을
왜 이다지도 죄는 깊어서
가슴가슴 자국으로 남아 있으니
저 눈으로 지워지길 바라고 있으니
첫 눈의 낭만 같은 것 이제 없구나
지나온 것들은 다 아름답다는데
나는 부끄러이 외투 깃을 세우고
고개 숙이면 다시 아득하여서
몇 가닥 새치나 기르며 늙어가겠다.



*시집, 서른 살의 박봉 씨, 문학과경계








서른 살의 박봉씨 - 성선경
-삶, 편지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그 길 조금도 후회하지 않겠다
우표를 붙이고 주소를 적고
총총히 내가 가야 할 우편번호를 따라
내 닿아야 할 그곳 기쁘게 가서 닿겠다
먼 훗날 또는 가까운 장래
혹시나 하는 염려가 뒤따르더라도
결코 뒤돌아보며 한숨짓지 않겠다
먼 길을 가다 때로는 외지고 험난하여
간혹 알지 못할 서러움에 잠길지라도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그에게로 가겠다
문득 문득
내가 닿아야 할 그곳에서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꿈꾸며.





# 이 시는 한참 전에 읽었던 시다. 그 때는 지나쳤던 감정이 이제야 떠오르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이다. 어쩌면 나의 40대도 곧 저물어간다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시도 읽는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나 보다. 좋은 시는 이렇게 생명이 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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