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줄 哀

여덟 개의 슬픈 이야기

마루안 2020. 6. 21. 19:22

1, 비밀번호

 

한동안 헤어진 사람의 전화 번호를 잊지 않았다. 이유는 그 번호로 조합해 만든 비밀번호 때문이다. 가끔 생각한다. 아니 비밀번호를 넣을 때마다 생각한다. 대체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까. 어느 쪽이었든 내가 먼저 붙잡았어야 했다.

 

2, 망나니를 위한 변명

 

얼마전에 뉴스에 팔순 어머니를 응급실에 버린 오십대 아들의 기사가 나왔다. 요양원에 있던 모친이 갑자기 호흡 곤란을 일이켜 응급실에 실려왔고 응급 조치를 한 의사는 위기를 넘겼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어머니와 의사에게 폭언을 퍼붓는 이런 아들을 패륜아라고 부른다. 댓글 대부분이 아들에 대한 비판이다. 20년 후 너도 니 자식한테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등 악필이다. 그중 하나의 댓글이 눈에 띈다. 아들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다.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 노인을 모시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 맞다. 확증편향, 스톡홀름증후군, 범인에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 심리현상을 말한다.

 

3. 버스표에 대한 추억

 

몇 살 때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10대 후반이었지 싶다. 잠시 고향을 들른 나는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차부로 들어섰다. 몇 사람의 동네 사람이 앉아 있고 이모도 있다. 인사를 하니 이모도 서울 갈 일이 있어 가는 길이란다. 시골 차부는 근방의 안부를 주고 받는 복덕방 역할도 하는 공간이다.

 

차표를 끊으려고 하니 이모가 돈을 낸다. 내가 사양할 겨를도 없이 이모가 낸 돈으로 표를 끊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잠시 후 옆 자리의 이모가 말한다. 아까 당신이 내준 차비 달란다. 버스비를 드리면서 어린 마음에 기분이 상했다. 내가 언제 차표 끊어 달라고 했나?

 

나중 생각해 보면 내 잘못도 있다. 이모가 주변의 눈을 의식해서 조카의 버스비를 낸 것은 당신의 체면 때문이었다. 나중 단 둘이 있을 때 슬쩍 돌려주는 것이 맞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당신의 살림 형편에 조카의 버스비도 부담스러웠을 거다. 쓸쓸한 추억이다.

 

4. 어머니 푸념이다.

 

성은 모르고 이름도 <대수>인지 <도수>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그랬다. 그 사람 노름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데 당신 어머니에게는 모질게 대한단다. 늙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아랫목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는 어머니를 학대한다는 거였다. 냉골인 방에서 요를 깔고 누웠는데 그 요를 확 잡아 당겨 빼는 바람에 늙은 어머니가 맥주병 구르듯 저만치 굴러가더란다. 어머니는 못된 놈이라고 흉을 봤다. 대수 아저씨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참 목숨 질기다 했을까. 이래도 좀 더 살고 싶다고 했을까.

 

5. 동네 점방의 추억, 성냥, 양초, 사카린,,

 

러시아에 살 때다. .늦게 일 끝나고 집에 오니 불이 안 들어온다. 입구가 늘 컴컴했기에 이날도 그러려니 했다. 현관문을 열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가 난감했다. 마침 러시아 남자가 오더니 승강기 앞에 선다. 나는 1층에 살았다. 나는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라이터를 켜고 두꺼비집을 찾더니 러시아 말로 뭐라뭐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라인 아파트가 전부 정전인 모양이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계단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작은 양초 하나를 갖고 온다. 3분의 1쯤 남은 양초다. 그 양초로 그 밤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러시아 남자의 호의가 생각난다.

 

내가 살던 시골에는 점방이 있었다. 호롱불을 켰는데 훨씬 밝은 양초는 사치였다. 군것질 또한 먼 나라 얘기, 주로 성냥과 사카린, 미원 등을 사러 갔다. 그래 봤자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했을 것이다. 좀 사는 집 아이는 매일 그곳에 들러 군것질을 했지만 나는 언감생심, 사탕을 입에 물고 풍선을 사서 힘껏 바람을 넣는 아이가 부러웠다.

 

먼지 뒤집어 쓰고 있던 물건들의 유통기한은 있었을까. 추억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6. 동네 책방의 우울한 기억

 

1980년대 인도의 사상가의 책이 유행을 하던 때가 있었다. 이후 해외 자유 여행이 실행되면서 인도 여행이 열풍을 일으켰다. 그런 유행과 상관 없이 내게 인도는 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도 유행에 편승해 사게 된 책이다. 

 

동네 책방에 가서 책 이름을 말하고 책을 샀다. 제목만 같지 번역자도 출판사도 엉뚱한 책이다. 말 그대로 유사품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노점 리어카에서 인기곡들을 복제한 카세트 테잎을 팔던 때였다. 어리숙한 독자에게 해적판을 버젓이 정본이라 생각하고 내밀었던 서점 주인이다. 과연 책방 주인은 몰랐을까. 아마도 해적판 서적을 싸게 사서 팔았을 것이다. 깐깐하게 책을 고르는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왜 그때는 매사가 그리 어리버리 했는지,,

 

약국도 그런 곳이 많다. 연고 하나를 사도 제품명을 말하지 않으면 유사품을 내민다. 헌책방도 그렇다. 요즘은 기업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이 많아져 그런 일은 없지만 예전에는 헌책방 주인의 약장수 버금가는 상술을 경험해야 했다. 서점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다.

*이런 문구가 있다. 우리는(OOOO) 독자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 책을 만듭니다. 이런 광고에 속지 않는다. 어떤 식당 입구에 맛 없으면 공짜란 문구와 같은 상술이다.

 

7. 경희대의 추억

 

신촌에서 134번 버스를 타면 경희대 입구까지 갔다. 도중에 도심과 변두리 좁은 도로를 두루 경험하는 여행이 좋았다. 멀리 가야만 여행은 아니다. 경양식집 알바를 했다. 6개월 예정. 친구의 큰 누나가 경영하는 곳이었다. 한 달은 홀에서 하고 두 달째부터 임금을 조금 더 주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6개월 후, 그만 두겠다고 했는데도 사람을 구하지 않아 거의 1년을 채웠다. 일 할 사람이 구해지면 인계를 하고 나오는 것이 그곳의 규정이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러 사람을 구하지 않은 거다. 어렵게 후배 하나를 넣고 겨우 나왔다.

 

후배는 한 달도 안 되어 그만 두었다. 후배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을 전에 일했던 나와 비교를 하더란다. 전의 미스터 리(나)는 이랬다는 둥, 매일 그 소리 듣는 게 기분 나빠 그만 뒀단다. 

 

 

혼자 숨어 울기 좋은 곳


대한 성공회 교회,,
영국에서 14년을 살았다.
성공회가 국교다. 동네에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우리나라 교회가 외부인에게 개방을 하는 곳이 몇이나 있을까.

가끔 커피도 무료로 준다.
주로 노숙인들이 이용을 한다.
큰 배낭을 옆에 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제지를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나도 가끔 이곳을 갔다.
부근 공원을 산책하고고 마음이 시끌시끌하면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오곤 했다.
기껏 몇 사람이 앉아 있는 텅 빈 교회에서 나는 울고 싶을 때면 이곳에 갔다.

진짜 몇 번은 하염 없이 울다가 온 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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