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곡선 - 박성준
기념하고 싶은 날을 만듭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꿈이
꿈을 꿉니다 나는 내 숨소리에서 네가 가장 두렵습니다
남자가 안개처럼 눈을 감으면 만나지 못한 방들은 햇빛이 됩니다
이때 여자는 눈을 감고 겨우, 냄새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새들이 제 그림자를 쫓아가 울면 맥박은 조금 더 분명해졌을까요
어떻게 한 번쯤 죄인이 되지 않고서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먼 곳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말이든 해달라는 얼굴로
늘상 고함을 쳐도 좀체 구름 떼는 짐승 바깥으로 돋지 않고
용서나 허락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창문들이 어딘가 메스껍습니다
손톱처럼 웃던 여자는 하품을 하다가 눈물을 잘 흘립니다
종이에는 의자가 숨어 있고 물속에는 죄다 수술 자국뿐입니다
벌써부터 도착해 있는 자목련은 남자의 이마를 닮았습니다
신작로 위에 분분하던 잿빛들은 놀랍게도 무릎이 아닙니다
대체 이게 다라면,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고 여자는 계단을 붙잡아 지웁니다
우리는 평평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는
꿈에서나 슬퍼할 일을 먼저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시집, 잘 모르는 사이, 문학과지성
그리운 플랜 파랑 - 박성준
그리하여 나는 내 슬픔을 믿지 않기로 했다
우리 모두를 믿고 있었던 그는 좀체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아, 나는 쓸쓸하고 분주히
내 친절의 가면을 쓰고 안개 속에서 젖은 삭정이를 쓰러뜨린다
그와 나 사이의 숲이 가볍고 메스껍다
어디서 봤더라, 모르는 사람을 보게 되면
대체로 내가 낯설어지고,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노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천천히 공터가 된 식물
왜 그것만을 몰랐을까
저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살았습니다
희생이란 접어둔 곳이 없는 청결한 페이지입니다
씨앗은 딱딱하지만 늘 물을 품고 있다
다 알고 있는 풍경에 복종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쥔 술잔은 궁지에 몰린다 얼굴이 식민지 같다
그뿐이겠는가, 입술보다 공기는
너무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어
창밖에서 흘러가는 열심히 생긴 얼굴들과 빤한 약력들
캄캄하기 짝이 없는 용서
젓가락질을 잘하지 못하면 왜 나비가 날아가고 있는지
몸은 취하고 정신은 맑아진다
살아나 나타난 사람 때문에 나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떠나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울먹이는 그의 손을 잡고 내 믿음의 증거는
그늘뿐이었으므로 서로 마주 보고 있던 자리마다
나무가 없는 숲이 지나가고 숲이 요구하는 햇빛이 보드라워진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모르는 주소
그는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지 않았다
오래 보고 있었으나 아주 처음 보는 것 같던 사내
우리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던 그가 떠나자
우리 중에 가장 슬픈 사람으로 그는 판명되었다, 아니
누구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 슬픔에 마땅한 사연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으므로
어느 날 빈손을 내밀어 그를 다시 만난다 해도
끌고 다녔던 몇 개의 답변들이 겨우 그를
사람으로 취급하게 할 뿐, 나 또한 모르는 사람처럼
그를 반가워하겠다, 하여 나는
결코 누구도 모르지 않는 불편
어느덧 해가 되기 시작한 내 슬픔이
나를 믿지 않기로 한다
# 박성준의 시는 다소 긴 편인데도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이 대단하다. 압축미나 행간에 숨어 있는 여백보다 스토리가 있는 다음 싯구가 묘한 긴장감을 주면서 마음을 끌어 당긴다.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그의 평론 또한 핵심을 잘 짚어내기에 아주 쫄깃하게 읽힌다. 다음 시집이 많이 기대 되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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