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 종루에서 흰 발바닥이 흘러내릴 때 - 조유리
저만큼인가, 흰 나비와
나와의 거리
삼베 보자기를 풀면
저쪽 세상이 한 보따리 펼쳐진다
상여를 메고 꽃놀이 가신 큰아버지
암병동에서 성냥불을 쬐던 외사촌
까맣게 탄 망막 저편에
태를 놓아버린 첫아이
어느 먼 생이
쇠종에 수의를 입혀 저녁의 무덤가로 끌고 가는 걸까
무수한 밤을 살아온
한 편의 이야기도 아직 시작하지 못했는데
태어나 첫 울음이 한 약속을 믿었지만
눈물이 마르는 동안
얼굴은
식은 찻물로 돌아가고
누가 묽은 나날을 마흔 번 넘게 우려 건져내 버리는가
웃고 울다 쓸쓸해져 올려다보면
허공을 흘러다니는 나비의
흰 발바닥들
*시집, 흰 그늘 속 검은 잠, 시산맥사
피안 - 조유리
파지, 상한 달걀, 시든 파뿌리
고맙다
한 덩어리 노독을 얻어
삶이 아닌 것들 삶이 되게
구기고 깨뜨려
뒷모습 다 퍼내고
오늘 나는 먼 곳에 마음을 둔다
살아서는 지펴보지 못한
눈빛들, 저물녘 궁리포구에 널어둔다
썩은 냄새 풍기는 저것들
참 고맙다
# 시 한 편을 읽다가 단 한 줄만 마음에 꽂혀 스며들어도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두 시는 마음 가는 싯구가 너무 많아 어느 구절 하나 허투로 읽을 수가 없다. 시적 토대가 탄탄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고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갑 - 전윤호 (0) | 2019.07.16 |
---|---|
뜨거운 곡선 - 박성준 (0) | 2019.07.16 |
저수지 - 서광일 (0) | 2019.07.12 |
사리의 여름 시간 - 김윤배 (0) | 2019.07.12 |
성실한 앨리스 - 김사이 (0) | 2019.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