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평범한 일상 - 안시아

마루안 2019. 7. 9. 23:20



평범한 일상 - 안시아



비의 균열이 흘러내린다
더 이상 내력을 품지 않는 나무들 너머
대문은 닫혀 있다
내가 믿는 거짓들이 존재하는 거리
몸을 벗어난 그림자가 걸어나가는 걸 본다
나는 저 어둠의 형상화였을 뿐
창문과의 작별은 가벼웠다
흙을 씹는 불쾌한 감동,
평범한 절망이 두통처럼 스민다
외딴 국도는 우회로로 생각이 뻗어 있고
행인의 보폭은 그늘의 영역까지다
공중을 가르는 수직의 균열들이
주인 없는 술잔과 부딪치는 소리들
가위는 녹슬고 흰색은 더럽혀진다
밤은 내일의 일기를 쓰고
우산 없는 남자는 비를 맞는다



*시집, 수상한 꽃, 랜덤하우스








일기예보 - 안시아



우산을 들고 있다 건널목에서도
버스에서도 놓지 않는다
동전을 바꿨던 가판대로 되돌아간 것도
전화를 받으며 수첩을 놓친 것도 그 이유다
맑은 날 흘낏거리는 건 물론
얼굴에 뭐가 쓰여 있기 때문은 아니다


수첩에서 메모를 발견했다
첫차 시각과 좌석 번호,
나는 또 떠날 궁리를 한 셈이다
이름 하나가 선명했는데 불러보지 못한 고백이었다
카메라에 담는 건 꽃인가요
꽃잎을 흔드는 바람인가요
라는 질문은 유효했다
그날 이후 이곳엔 비가 정류하지 않았다


우산으로 타들어가는 햇빛, 펼치기만 하면
플라타너스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진다
승강장 뒤로 안전하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말랐다가도 물만 주면 초록을 들이미는
화분의 다짐이 소름 끼치기도 했다
그사이 당신은 호흡이 피고 지고,


오늘 반드시 비가 올 것이다
집을 나서기 전 나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시인의 말


태어나는 순간 섬이다
불온하고 찬란하게 켜두는 어둠,
습관처럼 벼랑을 세우는 기억은
내가 잠근 자물쇠의 안과 밖이다
네가 열지 않은 저녁의 창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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