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신파, 그 꿈꾸는 바보 - 윤석산

마루안 2019. 7. 9. 22:15



신파, 그 꿈꾸는 바보 - 윤석산



그해 1월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인근까지
쳐들어와, 우리들은 결국 군에서 제대도 못 하고
한겨울을 그저 내무반에서 보내야만 했다.
30개월도 더 지난 고참 병장들이 석탄난로 활활 타오르는 내무반에
둘러앉아 죽치고 담배나 피우며, 잡담이나 하며
언제 제대특명은 내려오는 거야, 하며 시간을 죽이던 시절.


구 병장, 머잖아 제대를 하면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지닌 구 병장님
그날도 내무반 뒤편 후미진 응달에 들어
열심히 대사를 외우며, 표정을 짓고는 했다.
"나를 버리고 가면 어떻게 하니, 아 아 사랑하는 순아!"
애절한 사랑의 대사에 이제 갓 들어온 이등병들까지 돌아서서 몰래 웃곤 했다.


지금은 그 구 병장, 그 신파조 대사에서 벗어났겠지.
그러나 아직도 들려오는, 내 삶의 내무반
그 후미진 뒤편에서 울려 퍼지는 그 산파의 목소리
30년이 지나, 40년이 지나 50년이 다 되어도
세상, 후미진 내무반 어디에서
나는 오늘도 꿈꾸는 바보, 신파의 제대특명, 받지를 못하였구나.



*시집, 절개지, 도훈출판사








우리의 낙원상가 - 윤석산



우리의 낙원상가에는
기타도, 트럼펫도, 드럼도, 전자오르간도
모두 모두 아직까지 번쩍이며 놓여있구나.
비록 지축, 지축 거리지만, 걸을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노인, 오늘도 우리의 낙원에서
기타를 매만지며
회상에 젖는다.
우리의 낙원이 그곳에 있으므로
우리는 행복한 회상에 젖을 수가 있다고.
비록 몸은 한편으로 쏠리듯 가누기 어려워도
그래도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 노인
오늘도 우리의 낙원에서
단돈 삼천 원에 따뜻하게 말아주는
순대국밥, 그리고 소주 한 잔.
행복해하고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낙원, 낙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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