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과 틈새의 시간 - 곽효환
푸르게 일렁이던 청보리 거둔 빈 들에
하얀 소금 덩이 같은 메밀꽃을 기다리는
비움과 틈새의 시간
배꽃과 복사꽃 만발했던 자리에
코스모스와 키 큰 해바라기 몸 흔들고
배롱나무 더 붉게 물드는
세상의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이
제각각의 빛깔을 머금고 뒤섞이는 시간
징검다리 여남은 개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물살을 건너
다음 계절에 닿을 듯하다
크게 물굽이를 이루며 사행하는 물살에
수없이 부딪히며 어질고 순해진 돌들에게서
거친 시대를 슳는 소리가 들린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뿐이겠냐마는
초록이 다 지기 전에
물길 따라 난 길이 문득 끊어진
강변 마을 어느 허술한 찻집에 들러
아직 고여 있는 것들
미처 보내지 못한 것들
함께 흘려보내야겠다
빠르게 질러가느라 놓친 것들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
찬찬이 새김질해봐야겠다
*곽효환 시집, 너는, 문학과지성
미루나무가 된 소녀 - 곽효환
낡은 화물트럭 털털거리고 지나간 비포장도로
뽀얀 흙먼지를 켜켜이 받아내며
가없는 벌판에 우두커니 서서
홀로 그늘을 낸 미루나무
그 아래 한 소녀가 서 있다
몇 번의 바람이 들고 나고
몇 번의 들꽃이 피고 지고
몇 번의 혹한이 그렇게 지나가고
어느새 하얀 머리칼과 주름 가득한
노인이 된 소녀의 얼굴에
붉은빛 비스듬히 기울어 들고
슬픔이 그렁그렁 매달린
커다란 눈망울 깊이
여름 설산이 드리워 있다
멀리 더 멀리 떠나간 사람들
끝내 돌아오지 않는
인적 끊긴 메마른 초원길
저 먼 꽃으로부터 올 그 사람 위해
몸은 둥지가 되고
세월은 수피가 되고
팔다리는 가지가 되어
허공 높이 무성한 잎새를 매단
마침내 키 큰 미루나무가 된 소녀
기다림과 그리움의 틈새에서
아득히 멈추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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