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그 후 - 서범석
지난 봄날 충혈된 눈빛으로
세상의 총총한 눈들과 날마다 통정하더니
이제는 삼복더위 피아간 흔적도 없어라
사람들은 잊은 지 오래여서
짙푸른 녹음 속 그대를 몰라본다
강한 햇빛을 견디며 재회를 기다리는
내년을 향한 그리움의 담금질 중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큰 나무들의 가지를 피해 가지를 뻗으며
돌아올 그날까지 녹색에 숨어 녹색 손 흔드는
현현할 수 없는 사랑의 모진 세월
소월이 산자락에 걸리던 봄밤
두견이 피 토하던 사연이 진본에
이미 갈피갈피 적혀 있었다
참사랑은 진실로 없다고
나무말미에 언뜻 피는 불꽃이라고
*시집, 종이 없는 벽지, 푸른사상사
능소화 - 서범석
아직도 세상에는 모르는 이 너무 많다
이 아픈 적황의 꽃에 달린 그 사랑 이야기
어느 날 꿈속인 듯 언뜻 본 공주님들
못잊어 못잊어서 상사병에 죽은 넋이
뱀으로 다시 나서 공주를 안았지만
공주는 죽어서 하늘 선녀가 되었기에
지금도 승천의 꿈을 위로 피워 올린다는
이 전설은 잘못됐다
무더위 무릅쓰고 뱀처럼 감기는 오름새만 본 것이다
나팔처럼 입을 벌려 사랑한다고
연다홍 목소리로 죽도록 불어대는 숙명이지만
때가 되면 깨끗이 떨어지는 결기를 봐야 한다
누구든 보았으면 말해보라
시든 얼굴 염치없이 꽃자리에 눌러앉아
노욕으로 썩어가는 능소화꽃을,
사랑이 아치로워 저승다짐은 할지라도
알아서 제때에 지지 않는 꽃 하나라도 보았는가
능소화는 묻고 있다
안고 싶은 사랑 죽이는 멍청이도 있느냐고
임 앞에 흉한 몰골로 나서는 맹추도 있느냐고
늙기 전에 어서 가서 임 만나 보고지고
의연히 떠나는 게 정해진 길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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