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꽃 - 허문태
물안개로 남겠다고 할 때
그냥 돌아 섰어야 했다.
가끔 생각나면 새벽 강가를 홀로 걷거나 할 걸
몸만 데우면 어디서나 피어나는 인정이
이 계절을 역행하는 것이라며
손을 잡아끌지는 말았어야 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이
조금만 참아 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
촘촘히 사금파리로 남아 있을 줄이야
깊은 밤
돌아누운 달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쉬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그 속에서 작은 돌 하나를 애타게 굴리면서
왜소해진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무수히 박힌 사금파리가 시리게 반짝인다.
*시집, 달을 끌고 가는 사내, 리토피아
강 - 허문태
누가 먹고 버린 통닭 뼈다귀에서
까만 강이 흐른다.
태고로부터 강은 수치스럽다.
뱀처럼 땅바닥을 교활하게 긴다.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지독한 겨울을 만나면 멈춘다.
사막을 만나면 도망치고
치욕의 한가운데를 무심히 흐른다.
푸른 별의 창자
내 몸에 창자가 있다는 것을
무단가출하고 삼일 째 되던 날, 그리고
호박꽃이 깊고 둥근 밥그릇으로 보일 때 알았다.
구불구불 수치스런 칭송을 껴안고 흐르는
치욕이 온기가 되는 지난한 몸짓을 보았다.
하짓날 가정공원
누가 먹고 버린 통닭 뼈다귀
티끌 같은 개미들이 까맣게 들러붙었다.
강이 발원하여 흐르고 있다.
무료급식 행렬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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