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랑 - 김성규

마루안 2019. 6. 21. 22:27



유랑 - 김성규



나, 걸었지

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

길은 멀고도 먼 바다

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뒤를 돌아보았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었지

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

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

깨어보니

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

이미 지워진 발자국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








소나기 - 김성규



할머니는 시집와서 아무도 모르는 산 너머에 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는 자라 하늘까지 닿았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짐승은 죄를 지어 일만 한다 하지만

소가 일하지 않는 날에도

비를 맞으며 밭고랑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간다 하니

하늘 어딘가에도 마당이 있을 것이다


그 마당에서 아홉 잔의 술과

아홉개의 떡을 먹으며 노래 부르면

호미는 말잔등으로 변해 달리고

타령조로 울다 웃다

목이 쉬면 까마귀를 달여 먹고

지상에서 추지 못한 춤을 출 것이다


산 너머에서부터 바람이 우는 소리

가죽나무가 팔을 허우적대며

홀러가는 공기를 입안에 우겨넣는다

고깃덩이가 제사상에서 냄새를 피우는 날


이르지 못한 간절함이 인간의 들판에 비를 부른다






# 읽고 난 시집을 꽂아 두고 틈틈히 읽던 시절이 있었다. 갈수록 그런 일이 줄어든다. 새로 쏟아져 나오는 책 더미에 손 가기도 바쁜데 한가하게 읽은 책을 다시 펼칠 여유가 없다. 모인 시집들은 주기적으로 어디론가 사라진다. 책은 떠나지만 좋은 시를 기억하기 위해 이 공간은 소중하다. 놓칠 뻔했던 좋은 시를 읽는 행운은 만들어야 한다. 오늘 운수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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