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老眼)으로 당신을 읽다 - 윤현주
조금 물러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하게 보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당신을 낱낱이 속속들이 독해하려고
바짝 끌어당겼던 나날들, 그럴수록
안개처럼 모호하고 난해하고 흐릿해지는 당신,
이제는 조금 넉넉하게 물리려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다 보면
자석의 극이 밈과 당김의 성질을 툭 놓아 버리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은 비로소 읽히기 시작합니다
꽃의 화려함을 채집하기 위해
꽃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
애착의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고
원망의 안경을 벗어던져도 초점이 잘 잡히는
그 어디쯤의 지점에서, 당신이란
난해한 책이 조금씩 독해되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당신을 학습하기 시작합니다
*시집, 맨발의 기억력, 산지니
맨발의 기억력 - 윤현주
오래 나를 끌고 다닌 구두 한 켤레를 버렸다
낡은 구두를 버리는 것은
밑창에 말려 온 욕된 시간을 두루마리째 버리는 것
맹목으로 걸어간 진창길을 수레째 버리는 것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견의 굽을 통째 버리는 것
밑창에 밟혀 무릎 꺾인 풀들의 한숨과
발등에서 낙상한 벌레들의 신음을 양동이째 버리는 것
새 구두를 신고
다른 사람이 되어 경쾌하게 집을 나서는 아침,
그렇다고 해도 끝내 다 버릴 수 없는 것은
맨발에 새겨진 부끄러운 몇 짐
사람은 죽을 때 신발을 벗지만
일생 걸어간 흔적까지 다 벗진 못한다
맨발의 기억력은
머리보다 가슴보다 오래가기 때문이다
맨발의 일생
머리와 가슴을 떠받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 윤현주 시인은 1963년 경북 경산 출생으로 경북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부산대 국제전문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4년 <서정과현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맨발의 기억력>이 첫 시집이다. 현재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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