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빗속을 간다 - 류정환

마루안 2019. 6. 18. 22:02

 

 

빗속을 간다 - 류정환


발목을 적시지 않고
이 세상 어떻게 건널까.

밤낮으로 비가 내려 발끝마다 물길을
징검다리 건너듯 겅중거리는
빗줄기 사이, 사람들 사이

아무리 조심을 해도
입방아에 올라 이마를 찧듯

어느 틈에 신발에 물이 스며
양말이 젖고 옷깃이 젖어들고
우산 아래 아무리 몸을 줄여도
머리가 눅눅해지는 오후.

마음을 다치지 않고
이 세상 어떻게 건널까.

 

 

*시집, 검은 밥에 관한 고백, 고두미

 

 

 

 

 

 

폭주족 - 류정환

 

 

누군가, 또 한 사람

이 세상을 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골목을 헤매고 있는지

좀처럼 귀가하지 않는 잠을 기다리는

여름밤, 비 쏟아져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지상(地上)은 젖어 있었던 게 틀림없어. 우산이 없이는 외출할 수 없는 이곳은, 그러니까, 잠시 스쳐 가는 간이역. 허름하고 누추하고, 좀 더 빠르게 지나쳐야 할, 그러므로 우리에겐 튼튼한 바퀴가 필요할 뿐, 내일이라든가 희망 따위는 배낭에 챙겨 넣을 필요가 없지. 짐이 무거운 아버지가 되는 게 두려워. 오랜 세월을 견디어 화석이 된다거나 믿음직한 흔적을 남겨 궁상 맞은 전설이 되는 식의 줄거리는 식상해졌으므로.

 

서둘러 폭우는 지나가고 다만 눅눅한 골목,

바퀴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두처럼 몸을 낮추고

폭주(暴走)의 꿈으로 몸이 달아

뒤척뒤척 땀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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