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담장이 되지 못한 벽돌에게 - 박정원

마루안 2019. 6. 11. 19:31

 

 

담장이 되지 못한 벽돌에게 - 박정원


거대한 조직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고
쓸쓸해하지 마라
높고 견고한 담장이었더라면
아랫머리를 짓밟고
고린내 나는 위 그늘에겐 평생을 조아리며
옴짝달싹도 못했을 것 아니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육중한 경계를 긋지 않게 된 너를
외려 부러워할지니, 자유로워라
어둠에 팽개쳐진 벽돌 한 장이여
상처투성이로 살지 않았다면 어찌
무상으로 세든 독거미의 갖은 횡포를
목격할 수 있었겠느냐
휘돌아오는 바람을 되돌릴 수 있었겠느냐
다시는 담장이 되려 하지 말고
풀벌레 편히 드나들 고요한 집이 되라

 

 

*시집, 뼈 없는 뼈, 종려나무

 

 

 

 

 

 

명예퇴직 - 박정원

 

 

네 편 내 편으로 가르는 동안

벽 속에 뿌리를 튼 자물쇠도 서서히 녹이 슬어갔다

쇠사슬에 묶인 주먹들을 불러내보니

부스러기 일어나는 쇳가루에 불과했다

매일 잠그려던 부귀영화도

그 자리에 그대로 놔뒀어야만 했다고

속곳 깊이

성난 입김만 붉다

살아오는 동안 녹스는 일이 어디

한두 번뿐이었으랴

살짝만 건드려도 부스러지는 쇠사슬로

꽁꽁 옭아맨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옹다옹 싸우는 현장만 찰칵찰칵 채우다가

버얼겋게 독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저앉은 그늘 또한 붉디붉은데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느냐

머리 위에 옆구리에 발밑에 온통 핏빛이다

녹슨 마음으로 무엇을 여닫겠다는 것인가

 

 

 

 

*시인의 말

 

분명한 것은

너로 인하여 웃고 운다는 것

어쩌랴 또 말만 앞세웠다

나아진 것 하나도 없으니

지은 빚이 태산이다

날것으로 놔둠만 못했던 게 아닌가

전한 대로 베끼지 못해 미안하다, 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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