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심해의 열 달 - 박서영

마루안 2019. 6. 11. 19:49



심해의 열 달 - 박서영



슬픔의 이끼가 가득 낀 밤의 은하수
파리지옥 꽃밭이 흐른다
아름답고 긴 유혹의 비늘 속으로 들어가
전 존재를, 출생과 사망과 역사를 잊어버려도 좋겠다
이 밤의 사랑을 '전생의 사랑'이라고 하자
'이승의 사랑'이 전쟁과 난투극으로 무서워질 때
이곳에서의 사랑은 끝에서 시작되어 끝까지 무럭무럭 사라지는 일에 자신을 바칠 테니까


냄새를 풍기며 고백을 한다면 나를 의심하겠지


이곳에서의 사랑은 순식간이 없고
고요한 자장가처럼 계속계속 자라는 거라서
벚꽃나무와 사과나무처럼 피부를 뚫고 나온다
어느 봄날 고양이 시체에서 민들레가 피듯이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듯이
우리는 어딘가 사라졌다가 다시 사라져버린다
그때마다 조금씩 발달하는 머리와 심장
탯줄을 따라 흘러드는 당신의 고통을 느낀다


몸 밖까지 자라는 사랑은 의심받겠지


나는 아직 내가 태어날 시간과 자리를 모르는 채
심해의 태아처럼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밤의 사랑은 끈적끈적한 감각의 털들이 되살아나 누구든 잡아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 파리지옥의 꽃밭이다



*시집,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통영 - 박서영



항구에 서커스 천막이 세워졌다. 밤마다 멸종된 새가 천막으로 잡혀와 사람의 사랑을 흉내 내며 날아다녔다.


줄에 매달린 채 한 마리가 한 마리의 목을 움켜쥐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린다. 가느다란 두 발로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날아가는 새.


누군가 바닥에 달의 그물침대라도 놓아 주자고 했다. 그는 발을 놓아버릴까, 그녀를 더 깊이 움켜쥘까, 아무튼 생각에 잠기겠지.


그들이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했을 때 누가 책받침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아침에 다녀간 울음이 떠올랐다. 나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걸까. 눈 뜨자마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알코올, 솜, 붕대, 거즈는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구름 속에 버려주십시오.


새는 잘 날아갈 수 있도록 뼛속이 비어 있단다. 아픈 사람은 아무 곳에서나 통곡할 권리가 있다. 긴 줄에 매달린 새를 갖고 놀다가 줄을 끊어버리는 하느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가을이 온다. 항구에 불빛은 쏟아지고 날아가는 새의 한쪽 발은 희고 한쪽 발은 검다.






# 박서영 시인은 1968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2006년 천년의시작>, <좋은 구름, 2014년 실천문학사> 두 권의 시집을 냈다. 2014년 제3회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는 그의 1주년 기일에 나온 유고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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