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여, 안녕 - 이종형
이것은 흐린 날의 이야기다
수국이 활짝 폈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잘 지낼 것이라는 다짐만 나누고 떠나온 날의 기억이다
헤어지면서 손을 한번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져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어둔 방에 숨어들어 깊게 금 간 심장을 꺼내
한 땀 한 땀 기워내던 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십 년쯤 걸리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씻었다
이제 입과 귀를 닫아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는지를
다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절이므로
이 정도는 헤아려주리라 생각할 뿐
그러므로 예의 바른 사랑이여 안녕
십 년 후에도 안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재회 - 이종형
각각 일행이 있는 한 사내와 여자가
모리화라는 밥집 식탁에 각각 자리 잡아 음식을 주문했다
사내는 보리비빔밥에 고추장을 너무 풀어 넣어 목이 막혔지만
건너편 식탁의 여자는 가만가만
들깨수제비를 입에 떠 넣었다
식사를 끝내고
먼저 일어서는 여자와
딱 한 번, 눈길을 마주친 사내
첫사랑은 뒤따라가지 않는 거라던
오래된 충고가 떠올라
끝내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달달하고 애틋했던 것인지
맵고 얼얼했던 것인지
지나간 시간에 관한
기억이 휘청거리는 오후
봄 벚꽃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고 지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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