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날 환생을 계약하다 - 박지웅

마루안 2019. 4. 16. 21:51



어느 날 환생을 계약하다 - 박지웅



감자들이 눈을 떴다
한동안 낌새만 살피더니 슬그머니 줄기를 올린다
저들은 원래 강한 씨족이었다
대대로 땅에서 굴러먹은 터
웬만해서는 생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는다
숨어서 꾸려가는 집안일에도 이골이 났다
고운 어둠은 새살림을 시작하기에 좋다
집구석에 방치한 상자에 한 집안이 생기는 것이다
기울어진 일가를 일으키는
저들의 방식은 대단히 정교하다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겨울을 나면서 계약한 일
감자들은 머리 맞대고 치밀하게 꾸민 것이다
누구는 상처 묵혀 진물을 내고
밑바닥에 깔린 식구는 몸을 삭혀 스스로 흙이 된다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목숨을 전달하는 것
그렇게 다시 인연을 맺는 것이다
물렁물렁한 얼굴 위로 올라오는 저 싹수들
나는 집을 뒤지던 손을 거두고 공손히 물러난다
단정히 앉아 옷만 남기고 꺼져가는 자들의 환생
살아서 죽음에 눈뜬 자들의 안색이 밝다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그림자들 - 박지웅



누구나 빈집 한 채 가지고 산다
빈집에 들어가 누워 나오지 않으면
그때 그것을 죽었다고 쓴다
저 집을 바져나간 산 육체는 없다
아니 살아서는 절대 못 나가는 집이다
토막 나면 토막 난 집에 담기고
부서지면 부서진 집에 담긴다
끔찍한 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 집을 빠져나가는 길은 단 두 가지
눈물이 되거나 핏물이 되는 것
네가 그렇게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면
이제는 차라리 슬픔을 응원하라
흔들어봐야 죽은 닭대가리 같은 믿음 아닌가
한 개비 담배만도 못한 안심 아닌가
재가 되거나 연기가 되거나
이제는 차라리 증발을 자초하라
한때 지조 없는 철새길 바랐으나
비둘기처럼 멀리 날지 않는 그림자들
잡히지도 않는, 한 걸음 나가면
한 걸음 들어오는 움직이는 빈집
모든 바깥이 끌려 들어가는
캄캄한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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