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이 부족하다 - 김수우

마루안 2019. 4. 18. 21:52



슬픔이 부족하다 - 김수우



충무동 선창가
버려진 저울이 돼지껍데기 같은 하늘을 재고 있다
생선꽁지 같은 통장을 버리고
끝내 건지지 못한 세월호의 깊이를 재고 있다


바늘조차 떨어져나간 저울은
제 몸을 뺀 세상의 넓이를 다 재고 있다


저울이 아무리 많다 해도 일 톤 트럭에 실려가는 흰 조화(弔花)를 잴 수 없으니, 아홉 개 전생을 기억하는 고양이를 잴 수 없으니, 잿빛 밥알 올리면 최초의 지구
를 알아보듯 흔들리던


저울은
무게가 아니라 무게 바깥을 증언해 왔다
비늘이 아니라 비늘 바깥을 증언해 왔다
저울 바깥은
영원한 감옥, 세월호 만큼 깜깜하고 깊은


애초 녹슨 저울은 증언하고 싶었다 버려진다는 것, 잊혀진다는 것, 잊혀진 후 삭제된 바다를 잰다는 것, 실종된 점심시간을 잰다는 것, 바늘이 없어도 마지막 증언자
로 살아간다는 것


난독증 환자가 되기에도
아홉 개 전생을 기억하는 고양이가 되기에도
우리는 아직, 슬픔이 부족하다
눈물이 석탄 같은데도



*시집, 몰락경전, 실천문학사








노란 배 - 김수우



노란 종이배 하늘에 떴다
심해의 젖은 어둠을 싣고 환하다 꽃지는 틈새로 그늘이 노오랗다


까닥까닥, 수학여행 떠났던 배 한 척 능선을 따라 오른다


단촌이라는 역을 지나고 무릉이라는 역을 지나는 동안
해묵은 갈대밭에 노란 배가 도착한다
푸른 마늘밭에 노란 배가 출발한다


까닥까닥, 하늘로 올라 깜깜한 창문을 밀고 적막한 우주로 나아간다


어떤 창을 두드려도 어떤 절망을 두드려도 답이 없는데
일 년이 태산처럼 아득한데
우듬지마다 속속 등불처럼 피어나는 세월호


어디에도 닿지 못할 물마루 노오랗게 일어선다


봄빛 게우는 이팝나무 길을 따라
무중력의 아이들 돌아올 것 같았는지
물그림자 흔들던 갯버들 혼자 두근두근 잎눈 틔우는데


얘들아 얘들아
까닥까닥, 보이니, 보이니, 모둠발로 걷는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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