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보살사 뒷산으로 세월이 간다고 - 류정환

마루안 2019. 4. 6. 18:38

 

 

보살사 뒷산으로 세월이 간다고 - 류정환

 

 

그 농담 같은 굽잇길을 어떻게 다 지나왔을까

보살사 극락보전 앞마당에 서서 중얼거리다가

뒷산으로 가는 세월을 보았다며

그대는 쓸쓸하게 웃었지요.

 

세월은 아마 산을 넘어간 모양이지요.

잠깐 낮잠에 든 그대의 배낭을 훔쳐 들고

달아나는 동네 악동같이 재빨라서

한달음에 훌쩍 산등성이를 넘어갔을 테지요.

 

그 길을 따라 꽃이 피고 지고

낙엽이 흩날려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아서

엊저녁 산을 넘어간 목탁소리처럼

산 너머 마을에서 무심코 같은 짓을 되풀이할 걸 알아서

 

그대는 여기 남아 헛헛하게 웃지만

산을 넘어가며 배낭을 뒤져 빈속을 들여다보고는

세월 또한 쓸쓸하게 웃었을 테지요.

 

 

*시집, 상처를 만지다, 고두미

 

 

 

 

 

 

손금 - 류정환

 

 

이놈의 강은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오랜 가뭄으로 거친 바닥을 드러낸 복류천(伏流川),

그 숨은 뜻을 읽지 못하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언젠가 핏물이 가득 흘러간 듯

검붉은 흔적이 역력한 물길의 상류가

나는 궁금하다.

 

그러나 족보처럼 완고하기 짝이 없는 이놈의 강은 

깊이를 짐작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강을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은

그 물살에 눈을 빼앗겨

헤어나지 못하고 모두 떠내려갔다.

밥은 안 굶겠구나, 심심풀이로 일별(一瞥)했던 할아버지도

귀하게 되겠다, 내 손을 뚫어지게 훑어보았던 할머니도

결국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부귀와 공명을 한 손에 쥐고

바다로 나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앉아

모든 목숨 가진 것들을 기다리는 덫처럼

도대체 소리가 없는 이놈의 강은

하류 어디쯤에서 문득 솟아올라 나를 데려갈 것이다.

 

움직이는 목표물을 응시하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숨기고 잔뜩 엎드린 바닥,

그 흔들리지 않는 침묵을 대할 때마다

벼랑에 선 듯 아득한 현기증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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