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 이설야
-모두가 꽃을 보기 위해 허공을 버틴다
호박꽃
저 여자
달동네 담벼락에 기대어
저토록 뜨겁게 웃는 걸 보니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보다
사랑받지 못해도
여자는 배가 불러
둥근 아이들을 낳는다
난 꽃이 아니야
넓은 잎사귀로 얼굴을 가린
호박꽃
양귀비꽃
옥상에 숨어 피고 있었다
노을이 붉어지자
선홍빛 꽃잎을 크게 벌리고
노란 꽃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주인 여자가 어미 개와 새끼를
양귀비꽃 앞에서 흘레붙였다
개줄이 심하게 흔들리다 조용해지자
축 늘어진 어린 수캐
그 옆에서 어미 개가 울고 있었다
얼음꽃
숭의동 집장촌 13호
선홍빛 유리문 안에
검은 속눈썹 붙인 얼음꽃들
핏기 가시지 않은
고통 몇십근
꽃방석 위에서
가늘게 떨고 있다
살얼음 낀 문이 열리자
흔들리는 저울 위에서
녹고 있는 꽃들
자목련
매 맞은 여자의 자줏빛 얼굴이
땅바닥에서 밟히고 있다
물거울처럼 너는 헛것! 헛것이었다고,
잠든 물고기처럼
모두가 눈을 뜨고
이 헛것인 세계를 겨우
보는 듯 안 보는 듯 그렇게 살아간다
바람이 여자의 얼굴에 금을 긋고 지나간다
종이꽃
신발에 꽃이 피었다
스물두켤레의 작업화에 꽃을 피워놓고
진혼굿을 한다
찢어지고 밑창이 다 떨어져나간
먼저 간 신발들에게
아직 살아 있는 신발들이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등화관제 - 이설야
죽고 싶다
는 말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닌
신흥여인숙 쪽방, 그 계집아이는 겨우 다섯살
족제비눈처럼 찢어져 있었다
단단하게 여물어 있던 아이의
아이 같지 않은 눈망울 속에
늙은 여자 여럿이 다투고 있었다
햇빛이 찾지 않는 내 방문을 자주 열었다
닫았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다가
한숨을 국물처럼 삼키던 아이
까맣게 타들어간 장판에 눌어붙어
늦도록 가기 싫어했다
아이가 사라지기 전
문틈으로 아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
의붓아버지라고 했다
다음 날, 온 동네 새까만 집들이
가슴에 덜컹거리는 문짝들을 달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이를 삼킨 어둠을 향해
별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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