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깨우고 싶지 않은 잠 - 박정원

마루안 2019. 4. 2. 21:48

 

 

깨우고 싶지 않은 잠 - 박정원


수없이 거느렸던 이파리들을 하룻밤 사이 단 한 장도 남김없이 내려놓은 은행나무
잎잎이 갉아먹던 소리들을 내려놓고 물들이던 색깔들도 내려놓고 보채던 식탐도 내려놓고 끼리끼리 나누던 온기도 내려놓고
늙은 두 내외만 기거하는 초가집처럼
때꾼한데

그것들은
하룻밤 사이가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내려놓을 채비를 하고 있었음을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신음소리를 듣고
뒤늦게 안다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와 곤히 잠든 딸아이 방에 오도카니 앉아
사위될 애가 만들었다는 청첩장을 고요히 꺼내 읽으며

 

 

*시집, 뼈 없는 뼈, 종려나무

 

 

 

 

 

 

마지막 힘 - 박정원

 

 

하룻밤 사이 일제히 지고 만 은행잎들

방금 칠해놓은 듯 온통 노오란,

샛노랗다고 말했지만 결코 샛노랗지만은 않은

도저히 인위적으로는 만들 수 없는 색깔들

여린 이파리의 팔목을 놓는 순간

이파리가 나뭇가지의 팔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

마지막 외마디 비명소리마저 삼켜버린

저 눈부심!

누가

그 극과 극의 간격을 더는 칠하지 못할 색으로 칠해 놨을까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피맺힌 절규가

왔던 걸음을 대못 치듯 쾅쾅 박는데

저승으로 가기 바로 직전

놓아버린 힘의 색깔이 저리 환할 것 같아

불현듯 목까지 찼던 말들이 잠긴다

나뭇가지들 내리치는 딱따기 소리 아래

언제 날아왔는지 참새 대여섯 마리

이파리무덤 파헤치는 부리 끝에 고요히

밥그릇 부딪히는 소리

죽음은 다시 죽을 수 없어 눈부시다

 

 

 

 

# 박정원 시인은 1954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98년 <시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은 아름답다>, <꽃은 피다>, <내 마음속에 한 사람이>, <고드름>, <뼈 없는 뼈>, <꽃불>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침 - 정영효  (0) 2019.04.03
식물들의 사생활 - 이설야  (0) 2019.04.02
고비 - 박숙경  (0) 2019.04.01
자목련 - 서규정  (0) 2019.04.01
풀리는, 손 - 이명우  (0) 2019.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