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만한 녀석 - 서규정

마루안 2019. 3. 11. 22:30

 

 

쓸만한 녀석 - 서규정


외로워라
물풀에 기댄 바위

우등상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보리피리 꺾어 불며 개근하던 녀석
밥 굶고 학교에 가서 청소당번이나 되던 녀석
여자 짝꿍과 사진 한 장 못 찍어 본 녀석
국방부 홍보영화를 보러가서 죽어라 박수치던 녀석
정보병과로 군대에 가서 소총수로 끝낸 녀석
넥타이 메고 공장으로 가며 만면에 웃음을 띄던 녀석
연탄가스를 마시고 출근하다 쓰러진 녀석
파업에 동참하지 못하고 덩달아 해고된 녀석
배 타러 가서 체격이 작다고 툇짜 맞은 녀석
친구의 여자 심부름이나 해주는 녀석
이렇다할 하이라이트가 없는 신비한 녀석
밋밋한 생활의 연속에도 왜 대체 혼절하지 않나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리워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그 사내


*시집, 직녀에게, 도서출판 빛남

 

 

 



우리숲 재생 처녀막에 대한 확인 - 서규정


단 한 번이라도 처녀막을 찢어 본 사람은 알지
꽁꽁언 얼음이 어떻게 깨지는가를
묵직한 쇠기둥으로 내려 찍은 빙판처럼
그네의 눈에 순간적으로 거미줄이 쳐지는 것을
연못 속에 놀러간 송사리 한 마리를 붙안고 뒹구는
잉태의 두려움
터질듯한 숨소리 햇살이여
오전에는 미치고 오후에는 돌아버리는 그리움 대신
방탄 유리창 사무실 의자에 앉아
어디론가 교신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저 여자가
두드리면 나타나는 남자
그늘이여 나만 모르고 있었네
이 시대의 처녀막은 저렇게 선명한 인터넷 화면이라는 것을
코끝에 알 수 없는 방울을 달고
스스로의 비닐을 찢어 준 여자는 알고도 남지
팅팅 불은 불임의 미꾸라지들을
우리 시대 어느 뒷켠 재상 화면에
방생 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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