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음행 - 이영광

마루안 2019. 3. 11. 22:08



늙음행 - 이영광



형제들이나 친구들은 다
잘들 늙어가는데,
나만 늙지 않는 것 같다
못 늙는 것 같다
시드는 몸 굽은 마음으로,
늙는 길은 어디 있지?
왜 길 밖엔 없지?
두리번거리는 사람
집을 깨고 다시 집을 짓지 않자,
생은 문득 멈추었다
불 켜는 창 환한 골목들
네거리는 젖어 번뜩일 때,
늙음행 이정표는 빗길에 지워지고
젊음의 미라는 옛집에 자고 있다



*시집,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방심 - 이영광



그는 평생 한 회사를 다녔고,
자식 셋을 길렀고
돈놀이를 했다
바람피우지 않았고
피워도 들키지 않았다
방심하지 않았다
아내 먼저 보내고 이태째
혼자 사는 칠십대다
낮술을 몇 번이나 나누었는데
뭐 하는 분이오, 묻는 늙은이다
치매는 문득 찾아왔고
자식들은 서서히 뜸해졌지만,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그는 이제 정말 방심하지 않는다
치매가 심해지고 정신이 돌아온다
입 벌리고 먼 하늘을 보며, 정신이
머리 아프게, 점점 정신 사납게,
돌아온다 그는 방심이 되지
않는다 현관에 나앉아 고개를 꼬고,
새가 떠나면 구름이 다가올 뿐인
먼 하늘에 꽂혀 있다
꽃 지자 잎 내미는 산벚나무 그늘 밑
후미진 꽃들에 들려 있다
그는 자꾸 정신이 든다
평생의 방심이 무방비로 지어진다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저녁엔 퇴근하는 내게 또 담배를 빌리며
어제 왔던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뭐 하는 분이오? 침을 닦으며,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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