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쓰는 낙서 - 심재휘
바람이 불지 않는 봄날에는 온종일
몸으로 낙서나 쓰듯 살고 싶다
유리창 너머 연둣빛들은
눈치 못 채도록 매일 조금씩 낡아서
기어이 초록의 문법이 되고
눈물 속에 반듯이 세운 글자들은
죄다 넘어질 운명이어서
하필 바람에 기댄 삶이었을까
탓하던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멀리 있는 산 빛깔보다
유리창에 고여 있는 얄따란 투명을 생각한다
있는데 만져지지 않는 이 쓸쓸한 일기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영원히 정든 집이다
바람을 바람대로 모시는 길 건너 은행나무가
스승인지를 알겠다
몸으로 쓰는 낙서는 바람 없이도
기꺼이 쓰러질 줄 아는 필체여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봄날에는 온종일
몸으로 낙서나 쓰듯 살고 싶다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빗금의 온도 - 심재휘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바라보는
아현동 기슭은 봄비 오는 밤이었다
인도 옆으로 오르막 축대가 있어서
누군가가 제집에 이르는 가파른 시멘트 길이
높은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밤이었다
가로등의 젖은 불빛을 몸에 쓰며
벚꽃들이 지척으로 헤프게 흩날리면
내리막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것이 벚꽃인지
봄비인지 아니면 또 하루였는지 알 수 없어서
미끄러운 빗금을 몸을 곧게 세워 오르던 사람
가파른 축대를 따라 사실은 엎어질 듯 오르던 사람
빗물도 옛날 같은 아현동이었다
비 묻은 차창에 가슴이 높게 고인 아현동을,
없어지는 동네인 듯 아현동을 빗속에 두고
버스는 곧 비 그칠 것 같은 광화문으로 향하는데
우산도 없이 언덕을 올라가던 사람은
이내 집에 들었으리라만
빗금의 풍경은 번지고 번져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봄비 오는 밤이었다
빗금에도 슬픔의 온도가 서리던 아현동이었다
# 심재휘 시인은 1963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이 있다. 대진대 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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