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은 슬쩍 피고 지고 - 윤의섭

마루안 2019. 3. 10. 19:15



생은 슬쩍 피고 지고 - 윤의섭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길가에서 파는 개구리 장난감을 바라보며

주름살 그득한 그는 신기한 듯 입을 벌렸다

누런 금니는 더 이상 햇빛을 머금지 못하고

멀리 펼쳐진 가을 들녘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한 방향으로만 계속 맴도는 개구리의 자전거

그는 조금 뒤 벌린 입을 얇게 다물고 흐뭇해졌다

어디선가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목청이 울린다

마당에 휑하니 남겨진 지난날들

너럭바위에 말리는 붉은 고추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개구리가 그리는 원을 보며

그는 어느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식들이 눈에 밟히는가 싶더니

차에 실은 물건을 오늘은 남겨가선 안 된다고

스산한 가을 나무 마른 잎 쓸리는 소리만 난다

곧 비가 올 것이다

회색 칠 하늘이 무겁게 짓누른다

신호가 바뀌고 그의 차는 느리게 원을 그린다



*시집,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문학과지성








바람의 사계 - 윤의섭



겨울


가로등 불빛에

부나비처럼 눈이 흩날린다

잠시 서 있는 사이 온몸에 눈이 쌓이고

갑자기 멀리 사는 그대 체온에 살이 녹는 듯하다

등 뒤로부터 훅 불어오는 바람결에

쌓였던 눈 흩날리고

나는 흰 뼈만 남는다




병동에서 내다보이는 수양버들

바람의 올을 풀어 소살거리는 늦삼월 뜨개질하다

마른 나뭇가지 투둑 부러진다 결코 소생할 수 없는


나무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태양을 따라 그윽하게 휜 등을 타고 살짝 들썩이는 기미 보이다

뿌리에서 뽑아 올린 그 소스라치는 경련이 비명을 지르며 나무를 빠져나간다

조금 뒤 길 건너 나무 역시 똑같은 몸짓으로 움찔거린다

살아난다는 것은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다

아마도 태양계쯤은 벗어날 수 있겠지

싸늘해진 네 침대 시트에 그토록 오래 누워 가라앉은 마른 등뼈 자국

바람처럼 일어나 어느 울창한 숲에 이르러 파닥거리려나

바람의 뼈는 그새 푸른 잎새를 기워 입는다



여름


위쪽으로 가면 여름이 나오는데 炎夏라고도 부른다

염하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살갗을 갖고 있다 혹여

천둥소리 내며 눈물 흘리면 사람들은 장마 진다고 했다

지금은 모진 가뭄이 들어 기우제가 끊이지 않지만

한때는 이곳이 푸르른 오아시스였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뱃머리가 꽂혀 있는 모래산을 성지로 여기며

지층에서 튀어나오는 물고기 화석을 장생불사의 약으로 쓴다

그리하여 염하의 사람들은 등에 비늘이 돋기 시작했고

모래풀 자라고 모래강 펼쳐진

사막을 헤엄치며 모래를 마신다

염하에는 모래바람만 우글거린다



가을


이 땅엔 가을이 없다

단풍이 물들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 떠오른 적도 있었지만

낙엽 밟으며 찾았던 단풍나무 숲엔

덩그러니 바람만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내게 남아 있는 가을의 기억이란 방금 전에 생긴 건지도 모른다

바람 속으로 들어가면 코스모스 핀 들길이 펼쳐 있어

잠자리 높게 낮게 날아다니고

짚가리 올리던 아버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

논둑에 깜빡 졸던 나만 빼놓고 다들 여기 와 있었구나

바람을 빠져나오자 어깨에 코스모스 꽃잎이 묻어 있다

딸애는 가을이 무어냐고 물었고

나는 모르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내게 겨우 남아 꽃잎만큼 펼쳐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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