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값 - 함순례
갓 스무 살 큰언니와 눈이 맞은 가난한 시골 청년은
우리 집 마당에 무릎 꿇어 앉아 밤을 새우고
찬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쫓겨나고
방문 걸어 잠근 채 곡기를 끊고
가난한 삼대독자 청년의 어머니는
눈물바람으로 달려와 읍소하고
아버지에게 욕 진창 드시고 핏기 없는 돌리시고
윗말 아랫말 소문은 흉흉하고
남의 집 귀한 아들 잘못되면
그게 더 큰 욕이라 생각하신 엄마가 베갯머리 송사로 아버지를 달래기를
몇 날 며칠,
대문을 박차고 나선 아버지의 일갈이 이랬다
내 그놈 목숨값을 받아야겠다!
열세 살 내게 첫 형부가 생긴 사연이다
혼례 치른 지 네 해째
세상을 뜬 아버지 대신 큰형부는
우리 여섯 아우 아비 노릇 오라비 노릇으로
그 목숨값 톡톡히 치른 셈인데
목숨 걸고 살고 싶은 이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인가
뜬금없이 궁금해지는 날이 많다
어느 날 큰형부는 삼십 년 지난 세월에도 빙긋 웃으며
천천히 대답하신다
언니 아니면 벌써 산 사람 아니었다고
자신의 목숨값은 자신이 매기는 거라고
*시집, 혹시나, 삶창
세 남자의 독법 - 함순례
올백머리에 일생 한복을 입은 첫 남자, 자수성가의 표상이었다 지극히 부지런하고 흙과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전업은 농부였으나 토정비결과 책력 보는 법을 알았다 그러나 실패라든가 휘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한 해 농사 홍수에 쓸려나가자 그의 정신은 맥없이 무너졌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갔다 세상에 대한 의심 키우며 자신을 학대했다 어느 신새벽 뜰팡에 쭈그려 앉아 그 징글징글한 의심의 아가리에 농약을 들이부었다 생전 다져놓은 마당이 가뿐하게 그의 몸을 받아주었다
열넷에 학업을 작파한 두 번째 남자, 스물한 살에 가장이 되자 우사 늘리고 소를 사들였다 산밭 가득 뽕나무 심었다 소값 파동이 불어닥쳤고 뽕밭은 풀섶이 되어갔다 덤프트럭 운전을 했고 화원을 차렸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가 풍란을 다루는 솜씨만은 예술이었지만 근면의 밑끝은 짧디짧았다 사업이 자릴 잡기 시작하면 으레 사람을 부렸다 손대는 족족 말아 드셨다 누구는 매사 운이 따르지 않은 탓이라 안타까워했고 누구는 게으름은 하나님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로 치부했다 인간의 숲에서는 무얼 해도 춥고 배고팠던 그는 풍란 캐러 산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낯선 하늘의 행불자를 선택했다
세 번째 남자, 돈키호테였다 허우대 멀쩡하고 언변이 좋았다 유년에 벌써 총명한 머리 인정받아 밝은 미래를 점쳤으나 노력이 받쳐주질 않아 그냥저냥 살았다 매사 습득이 빠르고 의협심 강했으나 그의 적은 여자였다 한때 반짝 노력하여 얻은 경찰공무원 시절, 첫사랑에 홀려 야반도주했다 거창하게 사표까지 냈다 민중을 구하지도 여자를 구하지도 못한 채 한세월을 회복 불가로 살았다 사이, 여전히 얼굴은 반반하나 그뿐인 여자들이 그를 스쳐갔다 기이한 일은 그의 재기가 여자로부터 온 것, 얼굴 이쁘고 착하기도 한 여자가 신의 선물처럼 왔다 이제 그는 생의 반구비를 돌아 세상을 다시 읽고 있다
# 시를 읽으면서 마치 내가 그 안에 들어가 함께 부대낀 경험담을 회고하는 느낌이다. 내 맘대로의 시 읽는 방식이다. 이런 시에 빠졌다 나오면 내가 문자를 익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주변부에서만 서성거리며 낭비해버린 내 인생, 인생이 조금 안 풀리고 어긋난들 어떠랴. 읽을 줄 안다는 것, 이런 때 행복하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금을 읽다 - 정훈교 (0) | 2019.03.08 |
---|---|
내 죄는 무엇일까 - 김사이 (0) | 2019.03.07 |
복지사 날다 - 박형권 (0) | 2019.03.06 |
생과 사의 다리 - 백무산 (0) | 2019.03.06 |
그래도 그런게 아니라는 - 김명기 (0) | 2019.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