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과 사의 다리 - 백무산

마루안 2019. 3. 6. 23:11



생과 사의 다리 - 백무산



나비는 따듯한 계절을 살다 간다
건널 수 없는 빙하기가 오기 때문이다


날개를 단 다음부터 나비는
생존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날개는 무도의 의상이고 꿀과 춤은 축제의 기쁨이다


애벌레 시절에 생활을 졸업한다
노동의 계절을 마치고 날개를 단 후엔
천상과 지상의 중간을 사는 축제의 참가자일 뿐이다
그리고 즐거운 짝짓기를 하고 기쁨의 알을 낳는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중간 같은 건 없다
삶에 가파른 절벽을 그려놓고 시간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비참을 감추려고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자꾸 우겨대지만
돌아서면 개소리 같다


축제를 몰아낸 공허한 몸에 노동이 자학처럼 물고 있다
노동이 다 빠져나갈 때를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말라야 아래에는 나이가 차면 순례길에 나서고
순례 끝에 출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다


우리 옛사람들도 또 왕들도 나이가 들면 곧잘 출가하여
다른 생을 살았다 한다


출가보다 아름다운 일이
인간의 삶 속에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미황사 동백꽃 - 백무산



세상길은 땅끝마을에서 끝나고
마음길은 미황사에서 끝나네


저물녘에 닿은 일주문에서 지친 소의 고삐를 푸니
섣달 초닷새 붉은 달이 바위산에 걸리네


먼지 일으키며 풀 한포기 없는 몽매한 길
끌고 얼마나 멀리 헤매어왔던가
소는 자하루 돌계단에서 풀썩 쓰러지네


동백꽃은 필 듯 아니 피고
세상길 버리고 동백숲에 숨어든 새들
비린 울음 삼키고 이 밤 어디서 젖몸살을 앓고 있는지


지나는 구름 밤새 오락가락 요사 창에 흩뿌려대던 것이
눈송인가 했더니 새벽 뜰 가득 별빛 쌓여 있네


별빛 공양 이고 새벽 법당 차가운 문고리 당기니
길을 묻지 마라
여기 와서 길을 묻지 마라 하네
소의 행방을 묻지 마라 하네


길 끝난 마음자리 동백꽃 재촉하네






# 백무산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84년 민중시 1집에 연작시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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