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래도 그런게 아니라는 - 김명기

마루안 2019. 3. 6. 22:53



그래도 그런게 아니라는 - 김명기



난리통 같은 응급실 복도에
때렸다는 술집여자와
맞았다는 남자 사이
이제 간신히 잎새를 밀고 나온
꽃망울 같은 핏방울 번지는 밤


남자의 가족들
순하디 순한 남자
등짝을 후려치며 등신, 천치
매번 이렇게 당하는 게 사랑이냐고
이번만은, 제발 이번만은
너의 사랑을 고소하라며
불목의 사랑을 종식시키기 위해
악다구니치는 이 통속적인 밤


그 남자
그렁그렁하던 눈빛이
마침내 유성우처럼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이 모든 광경을 남의 일인 듯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더듬으며
뱉으면 이내 허공으로 사라질 말 대신
바르르 써내려가는 지독한 한 문장
그래도 그런 게 아니라는, 사랑은


창 너머 캄캄 어둠같이
이미 저버린 우리 속내 가마득한 어느 곳에도
누군가, 누구에겐가 깊숙이 그어 놓은
죽어도 지워지지 않을 칼금 같은



*김명기 시집, 종점식당, 애지








남도전언(南道傳言) - 김명기



작업장 한쪽에서 초로의 사내 운다
서울 큰 병원서 포기한 말기 암 아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 놓고
밤새 수발하다 밥 벌러 온 사내


며칠 동안 누구도 그와 말 섞지 않았고
눈 맞추지 못했다
눈 마주치거나 말 섞으면 애써 견디는 그가
와르르 무너질까봐 점심 먹고 모두 눈 감고
자는 척 한다
안락하고 제일 따신 휴게실 안 자리 비워 두고
모로 누워 칼잠 잔다
그렇게 며칠 서로 서러움을 모른 척 견뎠는데
누군가 건넨 피로회복제 한 병에 기어이 무너진 사내


"이녁 고향집 앞에 동박이 맺힐 거 인디, 꽃도 안 보고 갈랑가. 씨벌! 이렇게 다 내뿌리고 갈 거면서 지랄 났다고 너므 집서 삐빠지게 일했당가 처 묵고 싶은 거나 실컷 처 묵지. 암 것도 못 삼키고 다 게워 냄서 뭣 할라고 악착같이 살았당가"


끝내 어깨를 들썩이며 주저앉은 사내


점심시간은 멀었고
눈 감고 자는 척 할 수도 없는데
속절없이 눈물을 닦아 줄 자신이 없어
기껏, 그 슬픔 등지고서
낮은 독백처럼 혼자 뱉는 말


남도 끝자락 어디쯤
그녀 고향집 마당 동백이여
올 봄엘랑 제발 붉은 꽃 피우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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