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죄는 무엇일까 - 김사이

마루안 2019. 3. 7. 19:46



내 죄는 무엇일까 - 김사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낳고 젖을 주고 흙을 다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따닥따닥 붙은 콜센터에서 상냥하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아도 웃고 보이지 않아도 참아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직업소개소를 찾으니
학력 미달 경력 없고 나이 많고 애도 있어
손가락 하나로 끌려나왔다 끌려나가도 그 자리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지 못한다
네가 죽어도 일을 해야 해서
누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
기약 없는 먼 훗날을 끌어당겨서라도
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쪼들려서, 악착같이, 외로움에, 죄책감으로 찌든
수척한 감정들이 들러붙어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파란색일까 까만색일까 붉은색일까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공범 - 김사이



동동거리며 밥그릇 챙기기에 짓눌려 눈감고
쓰레기 같은 정치라고 등 돌려도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정치
정치라는 추상의 실체는
내가 관심이 있건 없건
나를 조종하는 유령 같은 것이어서
무의식을 파고들어 의식을 식성대로 요리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가
세금이 공정하게 쓰이기를 기대한다는 건
그런 낭만적인 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지는 싸움이라도 한다지만 무엇과 싸워야 하나
정치의 정서가 위험한가 정치적인 것이 더 위험한가
환한 햇살 뒤에 잔혹한 폭력이 웃고 있는
양면의 얼굴이나 사중의 관계가 얽혀 있는 광장에
털어서 구린내 나지 않는 인생 없으니
보수든 진보든 그 정치의 바탕에서 탯줄을 물고 태어나
정치를 지배하는 자 따라
내 삶이 갈대처럼 흔들리는데
불안이나 두려움을 잘근잘근 씹어 끼니를 떼우며
싸이렌에 홀려 뽑아주고 버려지는 버려져도 뽑아주는
한결같은 공범들이라
그 누구도 오늘을 피할 수 없는 단순한 진실이
새삼 뼈저리게 사무치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공범의 정치
공생(共生)하자며 공사(共死)로 간다






# 첫 시집 나오고 꼭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시인의 마음은 어떨가. 불임수술 하지 않고 자식 하나 더 낳으려고 애쓴 중년 여인의 홍조 띤 얼굴이 생각난다. 10년 터울의 늦둥이는 또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 여전히 울림이 있는 시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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