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 곽재구
사랑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세월은 가슴팍에 거친 언덕 하나를 새겨놓았다
사람들이 울면서 언덕을 올라올 때
등짐 위에 꽃 한 송이 꽂아놓았다
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눈물을 모아 염전을 만들었다
소금들이 햇볕을 만나 반짝거렸다
소금은 소금 곁에서 제일 많이 빛났다
언덕을 다 오른 이가 울음을 그치고
손바닥 위 소금에 입맞추는 동안
세월은 언덕 뒤 초원에
무지개 하나를 걸어놓았다
*시집,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문학동네
혁화쟁이 - 곽재구
장마 그친 맑은 강
부평들이 떠 하늘의 구름인 양 하였다
그의 생은 낡을 대로 낡은
버들가지 궤짝에서 나왔는데
두루마리 화선지 한 묶음과
오방색 물감 통이 나왔고
폭이 엄지손가락만한 가죽 붓이 나왔다
풀방석 위에 앉은 그가
제일 먼저 쓴 글귀는 인생만리(人生萬里)였다
말매미 울음소리 나무 이파리들 쩌렁쩌렁 흔들 때
청 홍 황 흑의 물감들이 뒤섞여
봄날의 꽃밭 같은 문자 그림이 태어났다
구경하던 사내가 즉석 주문을 했다
사흘 뒤 상량식을 한다는 그는
용(龍)과 구(龜) 두 글자를 원했는데
그가 혁필 그림 문자를 쓰는 동안
화선지 위에 푸른 용 두 마리가 내려와
뒤엉긴 채 꿈틀꿈틀하는 것이었다
어두워질 무렵
웃장의 신화국밥집에서
그와 돼지국밥을 먹었다
수염 허연 그가 몇 살인지 어느 도시를 얼마나 떠돌아다녔는지
사랑하는 이를 몇이나 떠나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이름이 적힌 혁화 한 장을 받았다
인생만리 바람 불고
초승달 곁 별 하나 다가가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그가 문자 그림을 그리던 강가의
부평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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