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대기 - 배창환
스물셋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안 오는 농촌으로 시집왔다
대구에서 여상 졸업하고, 오래비 학비 대는 재미로
염색 공장 다니다 만난 청년을 따라
난생처음 하는 농사일에 온 몸 쑤시고 다리도 후들거렸지만
두 남매가 제 얼굴 닮아 눈매 서늘하게 커가고
돈이 좀 만져지는 참외농사 재미가 쏠쏠했으므로
그녀는 신새벽에서 늦은 밤까지 남편 일을 도왔다
곱던 얼굴 볕에 그을고 손바닥이 까칠하도록 농사물이 들 무렵
조막만 한 면소재지에 다방이 여남은이나 들어섰고 도회지서 온
허벅지 미끈한 여자들이 오토바이로 차와 웃음을 실어 날랐다
재미 삼아 하우스로 몇 번 불러내던 영다방 김 양한테 미쳐서
돈 싸들고 따라다니다 함박눈 쏟던 날 사내는 결국 집을 나갔다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어린 아이들 늙은 시어미에게 맡겨두고
그녀는 이 악물고 두 사람 분의 농사일을 혼자 했다
그렇게 비바람 눈발 드센 들판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주먹눈이 몹시 쏟아지던 밤, 사내는
상거지 꼴로 돌아왔다 하지만 옛날의 그 사내는 아니었다
농사일은 아예 잊은 듯 골방에 틀어박혀 억병으로 마셔대던
쐬주로 한참을 몸 버리던 어느 날, 어디선가 전화가 오고
사내는 통장을 긁어 다시 집을 나갔다 그때 그녀도 함께 무너졌다
아무 데나 쓰러져 며칠을 울다 마침내 울음 그친 새벽이 왔다
대낮에도 귀신 나오는 컴컴한 대숲,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농약 병이 차갑게 빛을 뿜으며 뒹굴었다
타국처럼 낯선 땅, 뒷산 아카시아 비알에 그녀가 묻히던 날
하늘은 쨍쨍해서 비 한 방울 안 주었고 그녀가 누운
황토 새집 앞에 쓰러져 우는 사람은 친정 오래비, 한 사람뿐이었다
*시집, 겨울 가야산, 실천문학사
좋은 사람들 - 배창환
요즘 술집 찻집 어딜 가든 이 이름이 많다
사람이 얼마나 그리운 시대인가를
80년대 운동을 통해 체득한 이들이 붙인 이름이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다
내게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 때문에 내 삶이 아직 헛되지 않다고
시집 후기 어딘가에 적어놓기도 했지만
멀리 붉은 구름 내걸린 가야산 아래
고향으로 아예 보따리 싸서 들어올 때도
나를 놓아주지 않던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개발독재의 총검이 빛을 뿜던 시절이나
자본이 뱃속이 아니라 꿈속까지
다 차지해버린 이 황량한 시절에도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이 희망이었다
혹은 인간과 아름다움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눈 덮인 계곡 바위처럼 웅숭깊고
그 아래 물이 되어 흐르면서 깊어 가는
참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내 형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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