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아주 잘 지낸다 - 정성환

마루안 2019. 2. 18. 22:21



나는 아주 잘 지낸다 - 정성환



독거독거독거독거 발음하다 보면
어릴 적 툇마루 밑에서 살던 도그 새끼가
생각나 그 말 싫은데
삼나무 뾰족한 손들 잿빛 하늘구름 콕콕 찔러
고인 빗물 우두둑 털어내는 새벽부터 나는 절간
혼자 사니 할 말도 갈 길만큼 멀어져
쫑긋 정신 세워 봐도 가는귀만 먹는다
기나긴 구약 시편 읽다 모세도 다윗도 지쳐 들어가면
한낮인데도 외로움 굵어져 가슴에 큰 돌멩이
하나 얹어야 살 것 같다
침묵에 짓눌린 장판지 푸른곰팡이 벽 타고 이리저리 다니는데
내 문밖 외출은 늦게 돌아온 메아리마냥 뒷심도 없고
일기라도 한 줄 쓸라치면 유서 같고
부모님 전 상서로 시작하는 편지는 아예 부칠 수 없는 독거의 밤,
나는 이미 다 자란 사람처럼
오늘도 아주 잘 지낸다고 말했다



*시집, 당신이라는 이름의 꽃말, 문학의전당








불꽃처럼 사는데도 - 정성환



팽팽한 겨울바람 영글어 가면
사무실에게 일하는 나는 괜스레 죄 짓는 기분이 든다
내 불알친구 진수는 용접공
봄날 약수 뜨러 산 오르듯 아무렇지 않게
맨몸으로 난간을 탄다
세상 모든 불 끌어다가 차갑고 냉정하고 딱딱한 것들
사이좋게 이어 붙인다
마스크에 겁 없이 쏟아지는 용접 불똥만큼
사는 게 가볍지도 짧지도 않아서
친구는 창문 없는 여관 달방에서 산다
오십 넘도록 혼자 사는 친구는 그래서
불꽃 같은 여자보다 전구가 약해 흐릿한 불빛마냥
따뜻한 여자가 그립다고 한다
술 취하면 엄마도 보고 싶다고 운다
불꽃 닿은 자리마다 희망이 순식간에 식어가는 겨울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이원규  (0) 2019.02.18
허공의 길 - 안성덕  (0) 2019.02.18
어떤 일대기 - 배창환  (0) 2019.02.18
세월 - 곽재구  (0) 2019.02.17
퇴폐적인 사내 - 이용한  (0) 2019.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