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암사슴 같고 늑대 같은 - 강회진

마루안 2019. 1. 23. 19:35



암사슴 같고 늑대 같은 - 강회진



몽골 사람들은 늑대와 암사슴 사이에서
조상이 태어났다고 믿는다
초원을 달리다 늑대를 만나면 행운,
암사슴 같다는 말은 가장 예쁘다는 말
늑대 같다는 말은 가장 용감하고 멋지다는 말
여행길 좌판에서는 자주 동물의 뼛조각을 볼 수 있다
몸에 지니고 다니면 용감해진다는 속설이 있어서인지
젊은 사내들은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거나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한다
늑대처럼 용감해진 그들은 바람을 뚫고
암사슴 찾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뼛조각에 입 맞추며 돌아오곤 했다
밤이 되면 모닥불 주위로 암사슴들 슬그머니 찾아오기도 하는데
암사슴 같고 늑대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
주머니 속 뼛조각 슬그머니 쓰다듬어 보는 어떤 날



*시집, <반하다, 홀딱>, 출판사 장롱








역마, 살 - 강회진



몽골 사람들은 바람에도 색깔이 있다고 말한다 저물 무렵, 고비의 바람은 하얀 바람 사막에 조심스럽게 당신을 그려 본다 훅, 바람 불자 당신은 슬그머니 지워진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고 처음 들은 날,
산양자리인 나는 이상하게도
심장이 평소보다 쿵쿵 크게 울렸다
이 복된 저주
평생 길 위를 방황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에서 최고의 욕은
평생 한 곳에서만 살아라
정착은 곧 죽음을 말한다
칭기즈칸은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지,
나를 매장한 뒤, 천 마리 말을 몰고 무덤 위를 달려 흔적을 없애라
지금도 칭기즈칸의 무덤은 찾을 수 없고
누군가는 무덤을 찾아 지금도 떠돌고 있다


난로에는 시베리아 낙엽송이 자작자작 타들어가고 있다 낮에는 숲을 걷다가 마른 자작나무 둥치를 주웠다 먼먼 사람들이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새기듯, 껍질을 벗겨내어 당신의 안부를 새긴다 글자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지 허나, 열흘이면 당신이 있는 곳까지 가고도 남을 그때의 안부는 한 계절이 지나도 당신에게 가 닿지 못했다 얼마나 더 먼 곳으로 가야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 강회진 시인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2004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일요일의 우편배달부>, <반하다, 홀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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