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변명이 없는 병명 - 김연종

마루안 2018. 12. 17. 22:16



변명이 없는 병명 - 김연종



아무도 그 병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누구든지 변명할 수 있었다 뚜렷한 징후가 없어 모두 다른 처방을 내놓았다 잘못 채워진 단추를 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장 아늑한 방법은 산소 결핍에 의한 나르코시스라고 제멋대로 해석했다 담벼락의 경고를 힐끔거리며 가끔 몽롱한 상상을 했다 사라진 그림자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의사가 유심히 자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당신은 왜 불행한 그림자를 찾으려 하는가


자꾸만 침대의 머리를 거꾸로 돌리려 하는가


이미 잠든 그림자를 깨워 수면제를 먹이려 하는가


죽고 사는 일을 술 끊는 일처럼 반복하려 하는가


중독에 빠진 그림자를 구름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루 치의 운명을 잘 말려 담장에 내걸었다 허공에 떠도는 소문이 빨래처럼 펄럭였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증상이 퍼즐처럼 풀렸다 사라진 그림자의 행방을 다시 수소문했다 아무도 그 병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누구든지 변명할 수 있었다



*시집, 청진기 가라사대, 천년의시작








청진기 가라사대 - 김연종



또 한고비 넘겼다고


클라이맥스 지나 맥시멈 리스크 지나 고요는 찾아온다 발작 후 수면처럼 길고양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구름의 균열을 틈타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잠입한다 블라인드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 벌기일 뿐이다 수면제는 밤의 길이만 저만치 늘려 놓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구조대는 정시에 도착했다 악몽이란 수돗물에 씻겨 내려 갈 소문에 불과하다 고독사는 그늘을 먹고 자란다고 단골 의사처럼 투덜댔다 나쁜 습관을 문 밖에 내다 버리고 조석으로 햇볕의 양을 조금 더 늘렸다 강박처럼 손을 씻었지만 씻을 수 없는 고독이 무럭무럭 자랐다


더는 가망이 없다고


개장과 동시에 문을 닫았다 테이블 데스를 피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깨진 접시로 복이 들어온다는 중국 속담이 떠올랐다 뒤집힌 세월에서 모조품 같은 뼛조각이 발견되었다 병명이 적힌 명찰 뒤로 활력징후가 흔들린다 코드 블루가 반복해서 떠오른다


수술 부위는 잘 아물었다고


번호표를 뽑지 않은 사람이 먼저 길을 떠났다 서가에 꽂힌 죽음이 두려워 시도 소설도 읽지 못했다 서둘러 갈등을 봉합했지만 詩의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있다 벽화에 그려진 이별이 두려워 난도 애완견도 기르지 못한다 죽은 새의 가슴에서 돌덩이를 내려놓았다





# 읽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참 좋은 시다. 적당한 긴장감과 흥미로운 서술이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몇몇 의학 용어만 이해하면 온전히 내것이 되는 시,, 문학적인 어휘를 일상과 조합하는 시적 내공이 탁월하다. 독자는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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