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종이 거울을 보는 남자 - 황학주

마루안 2018. 12. 17. 22:02



종이 거울을 보는 남자 - 황학주



흰 도화지를 둥글게 오려
벽에 붙였다


집 앞에 떠있는 예쁜 섬들의 이름도 외우지 않는
나는 이제 누구의 마음도 훔치고 싶지 않아
때마침 내 안의 멍울에서 우러 나오는 노을빛을 바라보는 것인데,
내가 훔치고 싶은 건 허공의 내 얼굴
가볍고 낡은 악기 주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허공을 헛디디며 내려오는 바람이 마른 붓으로 쓰다 지우는


종이로 만든 둥근 거울을
하루 한번 들여다본다


얼굴이 비치지 않는
나의 발굴은 나날이 깊어져가고
기나긴 해안선으로 흘러가는 바람을 그리듯 여전히 난항이지만
누구의 입김도 서리지 않으니
찾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짜 나에 가까울 것이다
바래긴 해도 종이 거울은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삿짐 중 단 하나 가방에 넣어 직접 옮기는
흰 종이 거울


책꽂이 사이로 어둑어둑 밀물 드는 날
어떤 얼굴은 이처럼
우리 마음이 가진 몇 개의 둥근 우물의 백지로부터
소리 없이 발효되는 따뜻한 밑바닥으로부터
그리하여 몇 줄의 시로부터



*시집, 모월모일의 별자리, 도서출판 지혜








생일 - 황학주



이런 날
오가는 사람도 드문 바닷가 언덕
앉은뱅이책상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겸상을 한 가난한 연인들은
남은 동안 혼자 먹더라도
겸상을 하는 셈이겠지 가슴 아파서


툇마루 싸리바구니에 깔려 고사리처럼 고부라지는
석양은 몇 시인가
이런 날은 부엌이 먼저 어두워지고
그 속으로 안녕,
꽃다운 때는 몇 시인가


상처 금지
상처 금지
모자 밑으로
여러 번 키스해 줘야 입을 여는
소화 안 되는 고독,


그런 축하객이 하나
저녁 창가에 오려 한다





*시인의 말


시간이 없는 곳에선 사랑도 없을 것이다.

고맙다. 가고 있는 시간과 사랑이여.

내가 피어날 수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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