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같이 늙어가자는 말 - 황형철

마루안 2018. 11. 1. 21:05



같이 늙어가자는 말 - 황형철



같이 늙어가자는 당신의 말

인생 이모작 삼모작도 한다는데

벌써 늙어갈 것을 염려해야하나 쓸쓸하다가도

가만히 있어도 피차 늙기야 하겠지만

부부도 아니고 생몰도 다른 우리가

같이 늙어간다는 것

딱히 무슨 마음이 내켜서는 아니지만

밀월처럼 떠오른 말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

뭐라도 다시 작심을 해야 하나

쌍계사 가는 길 벚나무 화원을 전할까

곁에서 망울을 훔치며

나비가 되었다가 꽃이 되었다가

금방이라도 호사스럽게 터질 듯 설레는 말

우리가 가진 시차의 내외에

푸른 강물의 현(絃)이 울리고

나의 모든 저녁을 위해 내어준

무릎베개와 같은 말

비로소 당신과 내가 시공과 영혼을 넘어

합체하기를 염하며

남은 생의 공양을 담보하는 말

같이 늙어가자는 말



*시집, 바람의 겨를, 고요아침








새의 노래 - 황형철



새는 노래를 불러본지 오래다

아침 햇살은 새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길가의 은행나무는 술렁술렁 잎을 떨칠 뿐

푸른빛을 띤 적도 없고

지리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두통의 주기만 짧아졌다

군살이 낀 날갯죽지 때문인지

가만히 있어도 늘 삭신은 느른해

거울에 튕겨 나오는 라디오를 듣고서야

나절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간혹 느리게 유리문이 열릴 때면

탐스러운 바깥 풍경들이 주책없이 밀려와

잠잠하던 조류사 안이 울렁거릴 뿐

아무도 새의 노래를 찾지 않았다

늘씬한 오선지 위를 껑충거리는

상상으로 자위하는 동안

밖에서는 기호에 맞게

수런대는 새들이 쏟아져

버젓이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시인의 말


멀리 온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여전히 제자리에 가깝다.

잔뜩 취하거나 뜨겁지도 못한 채 무심히 세월만 흘렀다.

어둠이 걷히기를 희망하며 시와 내통하는 게 나름의 노동이고 책이었을 뿐.

풍진세상, 이 우주의 여행자로 살면서 만나는 매혹적인 풍경들과 기쁘게 대화하며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겠다.

그리고 기억의 안팎에서 풍화되어 가는 그것들의 쓸쓸한 리듬을 오롯이 새겨야하리.

주섬주섬 짐을 꾸리며 기진한 영혼을 추스린다.

다시 홀연히 떠나야한다.

흥미로운 바람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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