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소한 햇빛 - 송종규

마루안 2018. 10. 21. 18:42



사소한 햇빛 - 송종규



내 몸은 긴 이야기


많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몸속을 흐르고 있음을 나는 안다


일 년 내내 발바닥이 시린 것도, 왼손으로 덥석 악수를 청했을 때
약간의 자괴감 같은 것도 이런,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누군가 내 삶에 개입했고 누군가 끝없이 내 속에서 중얼거리지만 사실,
그들이 완성한 것은 미완의 내 노래에서 미어져 나오는
무성한 햇빛 같은 거, 이 지독한 폐허 같은 거


폭설이 내린 듯 문득 세상이 잠잠해지면 나는 잡목림처럼 무성해진다


몸의 긴 회랑을 돌아다니는 가로등 불빛, 도란거리는 그릇 소리, 연애, 전래 동화, 그리고 겨울 산의 능선,
그들이 품고 있는 사무치는 이야기들
그들은 꿈결인 듯 스며들어 있거나 슬픈 탕자처럼 돌아온다


왼손잡이는 안 된다고 오른쪽으로 숟가락을 옮겨 주던 사람은
노을 속으로 들어가고 없지만, 상수리나무 숲으로 들어간
여름밤의 술래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뜨겁고 시리고 물컹한 것이 내 노래에 묻어 있다


그 길고 긴 슬픔을, 사소하고 사소한 햇빛을, 그리고 커다란 당신


그러므로 내 몸은 긴 이야기, 이야기는 늙지 않는다


천년의 안쪽, 혹은 그 바깥쪽



*시집,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민음사








낡은 소파 혹은 곡선의 기억 - 송종규



내가 처음 밟았던 문턱의 둥근 부분
구름이 떠매고 가는 구름의 이력서
저물던 바닷가 전화벨 소리, 당신


시시콜콜 인간의 것들 다 기억하는 나를
아주 많은 날짜들 지난 후에 지울 수 있으리라 짐작하기도 하지만
당신이라 의심 되는
내 안에 저장된 너무 많은 겹겹 당신


그러나 모든 것은 안개, 환유, 공공연한 비밀, 거대한 나무, 당신


꽃 핀 들판이나
낙타의 느린 보폭, 허술한 회계장부 같은 내 낡은 문장에
혹, 당신을 새겨 넣어도 좋을는지


그러나 당신에 대한 기억은 쥐라기 공원, 초인종, 내 몸이 기억하는
난해한 곡선 몇 개


혹, 당신
언제 내 곁을 스쳐간 적이나 있었는지, 혹 언젠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 있었는지


아주 객관적인 햇빛이나 쇠락한 왕조의 뜰 같기도 한 삶에
당신이라 의심되는, 내 높고 낮은 기억의 소용돌이를
첨부해도 좋을는지


혹.... 당신,






# 송종규 시인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고요한 입술>,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 <녹슨 방>,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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