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남아도는 가을 - 이덕규
울퉁불퉁한 고구마 자루를 쏟으니
머리 맞대고 담배 돌려 피우던
고등학생 알머리 같은 것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덩치만 컸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뭘 봐, 그러면서
학교 앞 짱깨집에서 배갈 각 일 병에
자장면 곱빼기 외상시켜 먹고
뿔뿔이 흩어져 숨었다가 잡혀온 놈들,
복도 마룻장에
우르릉 무릎 꿇는 소리
몸에 힘 빼!
축구공처럼 딴딴한 엉덩이에서
박달나무 몽둥이 텅 텅 텅
튕겨나가는 소리
파란 가을 하늘에 비행기 편대 솟구치는 소리
*시집, 놈이었습니다, 문학동네
죽자 죽자 죽어버리자 - 이덕규
코밑이 거뭇해지던 늦은 겨울 이야긴데요 산속으로 솔방울 주우러 갔을 때 일인데요
인근 야산에 겨우내 사람들 발길이 잦아서 좀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다가 한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는데요
저걸 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아버리고 말았는데요
양지바른 산소 풀 위에 낯선 남자하고 이웃 마을 혼자 사는 친구네 엄마하고 꼬옥 부등켜안고 있었는데요
한동안 나는 거기서 꼼짝 못하고 뜨거운 손에 쥔 솔방울 하나를 다 부숴버리고 말았는데요
그런데요 친구 엄마는 울고 남자는 달래느라 나즈막이 속삭이는 소리가 생솔나무 가지를 타고 내려와
내 귓속까지 생생하게 흘러들어왔는데요
마침내는 서로 흐느끼면서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자, 하염없이 울고 또 우는 소리가 들려왔는데요
그날 늦은 저녁까지 나는 산속을 헤매다니며 죽자 죽자 솔방울을 마구 주워댔는데요
땅이 푹푹 꺼지듯, 무겁고 긴 한숨이 흘러내려와 내 작은 가슴을 짓누르며 두방망이질 치던 그 말,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자는 그 말을 부대 자루 가득 담아 메고 이미 어둑해진
겨울 산을 으슬으슬 내려섰는데요
그러니까,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깊은 신열을 앓으며 깜박 깜박 죽었다가 깨어나서는
비몽사몽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고 수없이 방아쇠를 당겼는데요 누군지도 모를 먼 사람에게
속삭이듯, 나지막이
죽자 죽자 죽자,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는 것이었는데요
# 한때 참 열심히 읽었던 시인이다. 늦게 발견된 좋은 시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희한하게도 비슷한 체험 때문인지 딱 내 얘기 같다. 대책 없이 뜨거웠던 청춘은 가을이면 더욱 불끈거리곤 했는데 이제 힘을 조금씩 빼면서 하늘을 자주 올려다 본다. 하늘은 높아졌는데 해가 많이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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