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들꽃을 보며 - 김완하

마루안 2018. 10. 5. 21:38



들꽃을 보며 - 김완하



가을 볕 속에서 색을 바꾸고
힘없이 지는 저 나뭇잎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들꽃 외에는 마음 주지 않기로 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던 그대 말씀
한여름 타오르던 태양의 약속도
식어 땅에 가슴 드리우기도 전
바람 한 줄기에 뒤척이며
그 약속의 말 부서져
후루루 떨어지는데
 

그대와 내가 걷던 풀밭
숨었던 들길 드러나 자꾸 휘어지고
저녁 노을에 그림자 터무니없이 길어질 때
이 세상 낯빛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기로 했다
 

풀 섶에 묻혀 제 낮은 키도
스스로 더 낮추는 꽃
풀잎들 모조리 쓰러져 누운 뒤에도
엷은 미소 머금으며
꽃잎 말라 으스러질 때까지
변치 않는 저 들꽃
 

가을 볕 속에서 색깔을 바꾸며
힘없이 뒹구는 단풍 보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들꽃 외에는 마음 두지 않기로 했다



*시집, 네가 밟고 가는 바다, 문학사상사








동백꽃 - 김완하



그대 기다림 이리 깊어도
더러는 돌아가야 할 때 있다
때로는 가지 말아야 할 길 있다


나 이렇게
그대 가파른 가슴 향해
아픈 꽃잎이나 툭 툭 던지면서
이만치 돌아서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길도 스스로 끊어지며
절벽 위에 동백 한 그루 가까스로 세워둔 채
그대 그리움 벼랑으로 누워야 한다


나, 그 끊어진 길에 이르러
숲 속 새소리로 가슴 지워야 한다
한정 없는 깊이로 무너져내리는 꽃잎
계곡 물소리 밑에 묻어야 한다





# 요즘 딱 어울리는 시다. 유난히 가을을 타는 몸이라 그럴까. 이런 시를 읽으면 쓸쓸함이 더해 왠지 모를 슬픔이 몰려와 가슴이 서늘해진다. 김완하 시인은 동백꽃이라는 제목을 단 시가 몇 개 있다. 동백을 아주 좋아하지 싶다. 그 중 가장 다가오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