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맞이꽃 - 권덕하

마루안 2018. 10. 1. 20:16

 

 

달맞이꽃 - 권덕하


올 추석엔 식구들과 둘러앉아 미음이라도 먹을 줄 알았는데 고향은 커녕 땅에 발 디뎌 볼 수조차 없는 몸 미음 한 그릇도 새삼 미움이 되는구나

나무 한 그루 없는 공장 골목 몇 해째 빠져나가지 못하는 눈길이나 전기 끊긴 집에서 아이들만 남아 촛불 들고 다닌 바닥에 촛농으로 굳은, 어지러운 어미의 눈물 자국이나, 다 내 탓이라면

젖은 만장과 검은 관에 실려 갈 육신의 뜻이 허공에 매달린 거처에서 다하고 마는 숙원이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기만 하라고 나를 달래던 일도 꽃말과 함께 이제 거둔다

내 발바닥과 저 애타게 그리운 땅바닥 내려다보며 꽉차 오른 보름달에게 등 돌리고 꽃의 신원 떠나 묻노니

밤마다 녹슬고 귀 떨어진 청동거울 뜨는 하늘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시집, 생강 발가락, 애지

 

 




붉은 달 - 권덕하


동굴 벽화 더듬다 보니 가을이 왔다 아이들 안색 살피다 하루가 가고 익은 것 추리다 해가 졌다

은행잎들이 바닥 환히 밝혀 놓은 선사(先史)의 가을밤, 아직 달로 가는 차편 예매도 못했다

흐르지 못하는 꿈으로 출렁이는 강변 매표소에 달그림자 어리고 때 이른 매진에 어두워진 얼굴들 줄 서서 기다리는 생의 정류장

기억에 뜬금없이 송어장 떠올라 시계바늘은 송어 떼 따라 돌고 달을 향한 마음만 부레처럼 부풀어 오른다

사냥꾼이 메고 올 붉은 다리고기 기다리던 여자, 과일 고르러 창고로 들어가는데

그 문에서 비바람 거친 붓질 자국 털어 내면 달빛의 음계 드러날까 거기에는 고요하고 쓸쓸한 과일의 영혼 담겨 있을지 몰라

여자가 고른 붉은 달이 떠오를 때까지 한데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달의 유민(流民)들

 



*시인의 말

그믐밤, 시 한 편이 불쏘시개처럼 탄다
언뜻 드러났다 더 어두워지는 길
못박힌 손금 위에서
비상점멸등 켜고 있는 반딧불이 한 마리
온몸으로 듣고 있다
깊고 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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