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분이 있던 자리 - 심재휘
바람 부는 날
강릉 송정의 해송숲에 가면
뒤척거리는 평지가 있다 한때 무덤이었던 것들
바닷가 주인 없는 땅의 허물어진 봉분들
순두부 한 그릇 먹고 나와
마을의 끝에 걸린 저녁을 혼자 걷다보면
해송숲에 가득 고여 있는 파도 소리가
바람 소리 같아서
죽어서도 찾아가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듯
바다 쪽으로든 산맥 쪽으로든 몇 줌의 흙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바람에 얹혀
기어이 더 흩어지고는
이제는 그냥 봉분이 있던 자리
다들 어디를 갔을까
헤어짐이란 서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해송숲이 심히 흔들리는 날
들어보면 숲에는 파도 소리만 가득한데
제자리란 원래 없는 것이라고
숲에는 갈 데 없는 파도 소리가 가득한데
얼굴 스치는 바람에 미쳐
그냥 바라봐야만 하는 바다 먼 곳
이곳은 봉분이 있던 자리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풍경이 되고 싶다 - 심재휘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 하면 나는 북쪽 창밖의 풍경을 데리고 가겠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그 은행나무숲에 나는 평생 한 번도 찾아가지를 못하였지. 더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숲의 셀 수 없는 표정. 내가 볼 때만 내 안의 풍경이 되는 풍경. 살다보면 이 집의 문도 밖에서 영영 잠글 때가 오겠지. 그러면 창밖 풍경을 데리고 다니다가, 애인인 듯 사귀다가, 나란히 앉아 더 좋은 풍경을 함께 보다가, 그와도 이별을 예감할 때가 오겠지. 그때가 오면 슬쩍 고백해보는 거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너의 뒤가 보고 싶어. 그곳으로 가서 너의 창밖에 사는 한 마리 무심한 풍경이 되고 싶다고 부탁해보는 거야. 누군가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풍경으로 살아간다는 거, 비바람에 함부로 흔들릴 수 있는 표정이 된다는 거, 그러니까 나는 너무 오랫동안 풍경을 바라보기만 하며 살았던 거지.
*시인의 말
길에 떨어져 터진 버찌들을 보면
올려다보지 않아도 내가 지금
벚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등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보리 추수는 이미 지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오래다.
보리서리를 눈감아주시던 외할머니의
거룩한 삶이 대관령 아래에 있었다.
검은 흙 속에서
감자가 익으면 여름이라는 것을 알 듯
내 몸이 강릉에 가고 싶을 때가 많다.
강릉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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