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경파독(難境破毒) - 백인덕
저녁은 멀고
비가 내릴 것 같아
거리로 나갔다.
팔 하나 잘라 던지려고, 묻어버리려고, 어디쯤
녹슨 입간판 위 올려놓으려고,
아무데나 높이 걸어놓으려고,
비는 여전히 멀고
저녁이 올 것 같아
함부로 나선 거리를 쏘다녔다.
울어라, 새여 비 올 것 같은 저녁이 좋으니
왼쪽의 비는
잡을 수 없어, 눈으로 세는 빗방울 속
눈이 뒤집히고
수만의 모기떼 날 듯 허공으로 흩어지는 나의 왼쪽.
언제나 시계반대 방향으로 도는
나팔꽃, 왼쪽은
비마저 비껴간 허공, 죽어라 없는 팔을
휘저으며, 함부로 나선 거리의 글을 읽는다.
비문(秘文)에 갇힌 새 몇 마리를 본다.
하루의 저녁은 언제나
저녁이 아니다. 이제 시작된 비가 기억 속에서마저
영원한 비가 아니듯, 잘린 왼팔은
결핍보다 부재에 가까웠던 것.
오른손 글쟁이는 왼팔의 허기를 읽지 못한다.
갇힌 새의 비 오는 저녁 희미한 석양빛에 끝내
다리 절거나 혀가 말리지 않는다.
울지 마라, 새야 비는 그치고 저녁은 곧 기울어 좋으니
*시집, 짐작의 우주, 리토피아
난경파독(難境破毒) 3 - 백인덕
-어떤 부고를 받고
돌아갈 집이 없으니 내 꿈은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에 담겨
푸르게 떨며 파리하게 빛나는 목숨,
허공을 건너간 먼지에 휩싸인 거미줄,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며, 흔들리며 집 대신 길을 찾는데
그렇구나, 새벽을
견디는 밝은 눈, 투명한 시력으로도 찾을 수 있는
길은 없고, 절벽 건너 절벽, 절로
발목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 세워야 할 뿐.
길게 떠돌 길마저 찾지 못했으니 내 꿈의 끝자락
영원히 응결하는 처마 끝 물방울로 맺혀
인드라, 인덕아! 나의 벗이여,
잠깐 날아가는 박새 밤톨만한 얼굴을 비추고
담벼락 끝 돌아앉은 어린 고양이 까만 털빛을 물들이다
이제 그만, 그렇구나. 무릎을 치며
일어서면 그 뿐.
시상을 끊는 전화벨,
멀쩡한 음성으로 이윤학을 읊조린다.
"인덕아, 남철이 형이 죽었다!"
"혹시, 잠적했는데 와전된 거 아니야!"
"아냐, 작가회의에서 문자가 왔어"
.......
격렬했던 별 하나 집어삼켰으니,
오늘 허무의 블랙홀은 또 얼마나 강력해질 것인가?
집 타령, 길타령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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