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景

능소화가 핀 파란 대문집

마루안 2018. 9. 21. 22:41

 

 

이 꽃이 능소화라는 것은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릴 적 동네 중간쯤에 부잣집이 있었다.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농사와 집안 일을 거드는 부부가 바로 옆집에 살면서 그 집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안다. 아마 머슴 비슷한 거였을 것이다.

 

아픈 사람이 있어서 그 집 어머니는 굿을 자주 했다. 이따금 골목을 지나가다 창백한 얼굴에 수염 덥수룩한 젊은 남자를 볼 때가 있었다. 아프다는 그 집 아들이다. 그가 한동안 안 보일 때는 멀리 원정 치료를 위해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집에서는 자주 징소리가 들렸다. 밤이면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고함 소리와 부부 싸움 소리가 들여왔다. 아버지는 굿을 반대한다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집 아버지가 무서웠다. 호기심에 대문 앞을 얼쩡거리다 호통 소리에 혼비백산 달아나기도 했다.

 

감꽃이 질 무렵쯤이던가. 그 집 담장에는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몰랐다. 그냥 꽃이라 생각했다. 호박꽃도 아니고 커다란 나팔꽃처럼 생긴 주황색 꽃은 여름 내내 피고 지고를 유지했다. 분명 능소화였을 것이다.

 

창백한 얼굴의 그 집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우물가에서 수군대던 동네 아주머니들 말에 의하면 못 고칠 병이라 했다. 능소화를 보면 그 집에서 들려오던 징소리가 생각난다. 추억이 소리로도 간직이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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