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와 나 - 김경미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시집,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지성
중년 - 김경미
찢어진 백화점 쇼핑백 속 흙덩이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고향 동창회에서 돌아왔다
몇 시간 기차에 흔들리던 흙 포대기 밖으로
색색의 채송화들이 불안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며칠 전 베란다 빨래 걷다 무심코
어린 시절 꽃 그립다 말한 아내,
호리병에서 솟아 나오는 백화점 한 채 본다
갖고 싶은 거 다 가지라고
손톱만 한 채송화들
중년의 품에서 뛰어나오는 걸 본다
어느 날 입 벌려보라고는 아내가 물고 있던
껌 얼른 집어가 우물대던
더러운 중년.
# 나도 한때는 맨드라미처럼 빳빳한 볏을 세우고 도도한 척 했었지. 어느덧 많은 걸 흘리는 중년이 되었다. 아직 30대처럼 창창하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밥을 먹으며 국물을 흘리고, 소변을 보면서 스스르 방귀를 흘리고, 소변 줄기를 제대로 끊지 못해 허벅지에 소변 방울을 흘리기도 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더러운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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