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때 나는 적막했고 - 손수진

마루안 2018. 9. 16. 20:55



그때 나는 적막했고 - 손수진



은행분소에서 남은 돈을 인출하고 돌아서는데
붉은 홍초가 현기증을 일으킨다
간밤에 내린 비로 계곡물은 불어나
세상에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흐른다
갈비탕 한 그릇으로 늦은 아침을 떼운 후
천천히 계곡을 오르는데
다시 비가 내린다
절간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자판기 커피 향이 침묵의 틈새를 건너다니는 동안
간이 서점에서 비구니의 시집을
알약처럼 나눠 먹었다
같은 시간 같은 추억을 공유한 당신
커피에 찍어 먹는 비스킷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갈
당신 몸에선 바람 냄새 묻어나고
각자의 생각을 끌어당기듯
댕, 댕, 풍경이 울고



*시집, 붉은 여우, 한국문연








우울한 그림 - 손수진



굶은 뱃속에 쏟아 붙는, 찬 소주의 싸늘한 몽환처럼
인생은 불온한 삐라처럼 사기처럼 그렇게 간다
그림자를 끌며 담장 밑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늙은 고양이의 굽은 등에 들러붙은 고독처럼
온기 없는 햇살은 마지막 빛을 유리창에 뿌리며 그렇게 죽는다
사랑을 잃고 사람들은 길, 속으로 사라지고
빠르게 왔다 가는 십일월은 시리게도 오래 뼛속에 머문다





# 미증유의 올 여름 폭염은 끔찍했다. 기세 좋던 더위도 계절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거짓말처럼 서늘해진 가을 날에 지난 여름을 돌아보다 이 시를 읽는다. 일곱 줄에 담긴 우울한 그림이 꼭 내 인생을 담은 것 같다. 미리 가본 늦가을이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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