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후 세 시 종묘공원 - 임후남

마루안 2018. 9. 12. 19:18



오후 세 시 종묘공원 - 임후남



한 사람이 오래도록 박카스병에 햇살을 담는다
오래도록 걸어온 사람은 제 걸어온 길에 취해
나무의자에 잠들어 있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신발을 찾지 못해
나뭇잎을 신고 있는 사람
좌판에서 훔친 손톱깎이로 제 시간을 동강내는 사람
내가 일어선 자리에 한 사내가 앉았다
저기 저,
꽃처럼 피어나는 잔기침 사이
오후 세 시



*시집,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 북인








늦은 오후 - 임후남



어느 날
서성대는 봄이거나
성큼 다가올 가을이거나
우쭐대고 올 여름이거나
숨죽이고 나타날 겨울이거나
그대는
내 안으로 그렇게 오겠지
입 안 가득 이끼를 키우다
내가 그대를 맞이하는 날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속으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들어오고
연근 같은 내 뼈 사이로
연꽃 한 송이 피어나리니


내가 그대를 만나러 가는
그 어느 날
내가 살던 골목 어귀 포장마차에서
늦도록 불 밝히고 젊은 사내가 팔던 그
짜고 매운 돼지곱창볶음 한 그릇
든든히 먹고 가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혹은 우연히라도
사랑해,라는 말을 진혼곡처럼 들을 수 있다면
그 어느 날
햇빛이 나뭇잎에 흔들릴 때
눈부셔 그대에게 가지 못할까봐
갑자기 두려워지는
늦은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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