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질량 - 박신규
버스가 떠난 뒤 한 남자가 운다,
이번 생에 주어진 슬픔을
모조리 쏟아부을 것처럼 맹렬하게
맞은편 정류장에는 그 남자의 울음을
뭉텅 덜어와 품고 싶은,
덜어온 슬픔만큼 더 서럽고 싶은
또 한 여자가 흐느낀다
몸에서 마음속으로
마음에서 몸속으로 들어갈수록
무구(無垢)해지다가 불식간,
섞이는 것이 눈물의 속성
눈물이 나기 시작하면 계속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서 더 눈물이 나는 것
생의 정오엔 우는 일만 남았다는 듯
광화문 한여름 땡볕 아래
버림받은 어깨들이 운다
울다가 버림받은 사실도 잊은 채 집중하면서
열렬하게 전력을 다해
어린애처럼 운다, 종내는
어린아이들이 운다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
김사인과 싸우다 - 박신규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의 일상은 응당 이러할 것이다
그와 한마을 동갑내기로 태어나 이틀 걸러 하루는 드잡이하는 것
세번 싸워 두번은 지는데 결정적일 때는 꼭 이기는 것
멀리싸기 시합을 하다가 그의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
'말천천히하기' 대회에서 우승한 뒤 날로 경신하는
우주에서 가장 느려터진 말투로
그의 복장을 터뜨리는 것
점빵집 딸내미를 먼저 찜했다고 밤새 싸운 뒤
서둘러 고백하고 껴안았다가 뺨 맞은 소문만 쫙 퍼지는 것
그래도 그 맵짠 기억을 품고 청춘을 견디겠노라며
고백도 못한 그에게 초를 치는 것
동네는 두메산골은 아니고 읍내고 아니고 면소재지 정도면 좋지
하나밖에 없는 구판장 막걸리는 항시 쌀되로 덜어줘야 하지
안 서운할 만큼 사카린을 치고
넘치게 담아 주모 엄지 맛도 봐야 더 좋지
취할수록 서운해져서 고래고래 노래 부르면
뉘 집 자식인지 이장집에서 무당집까지 죄 알게 되는
저지른 짓보다 곱절로 낯뜨겁다가
금방 다시 낯두꺼워질 수 있는 마을이면 적당하지
아비 몰래 논 서마지기 팔아먹은 돈으로
나이 많은 과부와 밤도망 치는 일은 있어야 하네
전주나 청주쯤에 살림 차렸다가 버림받고 돌아와ㅏ
암시랑토 않은 척 처자빠져 있다가
쬐금씩 부끄럽고 쬐금 더 억울해지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괜찮다, 괜찮어, 다 괜찮어.... 떼꾼하게 더듬거리는 그를 붙잡고
청춘은 다 갔네 어쨌네 같잖지는 않게 재재거리다
풀썩 낮술로 젖어드는 것
마실수록 자기가 담근 술이 더 맛있다고 우기다가
두 항아리 다 비우는 것
벌게진 얼굴로 나란히 노을 붉은 수렁에 빠져
멍하니 끔벅거리다가 찔끔하다가 낄낄대다가
비로소 어깨에 기대 꺽꺽 울어제끼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하네
# 박신규 시인은 1972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문학동네>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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