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 그 경계에서 - 이창숙

마루안 2018. 8. 21. 23:45



비, 그 경계에서 - 이창숙



고향집 무화과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잡풀만 우거져 바스락대는 안마당에도
비는 내리고


누구 몫의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듯
단단했던 인연의 끝도 쉽게 놓아버리고


아름답게 이별을 준비하는 일
슬픔을 희미하게 지우는 일


나는 지금 한 뼘만큼의
어둠과 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집,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 눈빛








처서 무렵 - 이창숙



구름을 빗자루로 누가 저리 곱게 빗어 놓았을까
구름밭에 앉아 호미질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콩꽃이 보인다 콩꽃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보였다 안 보였다 멀어져 있다


어린 나는 좁은 둑에 앉아 기세등등한 풀 쥐어
뜯으며 한 번씩 허리 펴고 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흙빛 닮은 얼굴을 아파했었다


아버지....


지금도 구름밭에 풀 죽은 베잠방이의 아버지가 서 있다
크게 콩꽃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땀에 젖은 바람이
걸어 나온다, 아버지처럼 맨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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