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막의 서쪽 정거장 - 김수우

마루안 2018. 8. 21. 23:02



사막의 서쪽 정거장 - 김수우



일년의 반은 바다가 되고
반은 모래숲이 되는 사막 서쪽을 아시나요
건너갈 수 없는 고요로 엎드렸다
모든 뼈를 세워 길을 만들며
비움을 되풀이하는 땅이 있답니다
세상의 시작과 끝이 선명한 그곳에
녹슨 냄비를 닮은 정거장이 서있지요
판자지붕이 환영처럼 삐걱대지만
실은 다락방 같은 사원이랍니다
멈추는 법, 머무는 법, 기다리는 법을
하루종일 중얼대는 거기선
먼지구름 몰아오는 바람의 옆모습이 잘 보이구요
삭정뼈 하나
물고기가 되었다가 전갈이 되었다가
낙타의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렴풋이 비치지요
벌거숭이 사막, 바다에 가슴을 대고
큰옷 입은 바다, 사막에 무릎을 대고
밀며 당기며 닮아가면서
내 어두운 단칸방까지 밀려옵니다
그 서쪽 정거장도
멈추는 법, 머무는 법, 기다리는 법도
삐걱삐걱 따라 들어옵니다



*시집, 붉은 사하라, 애지출판








나도 붉구나 - 김수우



나는 오랫동안 내 몸에서
억만 년 전의 붉은 꽃씨와
발자국화석과 퇴적지층을 보았습니다
이젠 마른 덤불로 굴러다니는
고생대의 물길을 넘으면서
오아시스를 찾아 일주일씩 버티면서
상늙은이 낙타가 된 나는
이제 내 몸에서
실밥과 구김살과 단추구멍 만한 창문을 봅니다
창문 밖에는 단추 같은 애기낙타,
선인장으로 꽃피고 있습니다
뱀도 추억도 까치발로 걷는 이 사막여행에서
저에게나 내게나
생은
크고 작은 단추입니다
붉고 붉은 단추입니다
하루 같은 억만 년을 잘 여미는
억만 년 된 오늘 하루를 잘 여미는






# 김수우 시인은 1959년 부산 출생으로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 경전>이 있다. 부산작가상, 최계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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