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나고 자란 마흔 살의 시인이 있다. 특별한 시인 기질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지만 억척스런 마누라 덕에 생활비 걱정 없이 산다. 그리고 마누라만이 자기를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로 알고 시인을 극진히 내조한다.
남편은 생활력이 없는 데다 무정자증에다 섹스에도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불임시술 병원이라면 질색팔색하는 남편을 데리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다. 백수 남편이지만 아내는 시인이 옆에 있어만 줘도 마냥 행복하다.
시인은 아내가 너무 자기에게 집착하는 것이 되레 부담이다. 시도 잘 써지지 않는다. 동인끼리 만난 시 품평회에서도 그의 시는 혹평을 받기 일쑤다. 풀 죽은 남편의 기를 살리기 위한 아내의 빽으로 초등학교에 일일 선생으로 시인이 초대 되었다.
첫 대면에서 개구쟁이 초등학생 하나가 묻는다. "시인인데 왜 그렇게 뚱뚱해요?" 시가 뭐에요라든가 좋은 시 하나 소개해 주세요가 아닌 이렇게 정직한 질문이 있을까. 아이들도 시인에 대한 나름의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시인에게 한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친절에는 무감각했는데 도넛 가게 알바 청년의 작은 친절에 가슴이 설렌다. 대체 무슨 감정일까. 그날부터 틈만 나면 청년이 일하는 가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아내에게는 없던 감정이 청년을 보면 설렘과 끌림으로 바뀐다.
결국 시인은 아내에게 청년과 함께 집을 떠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쓰던 아내는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한다. 제발 당신이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내 옆에만 머물러 달라고,, 이미 사랑의 방향을 정한 남편은 꿈쩍 않는다.
남편을 설득하다 지친 아내의 독설이 인상적이다. "뚱뚱하고 직업도 없고 시인 재능도 없는 너를 먹여주고 보살폈더니 결과가 이거니? 너 같은 삼류 시인이 동성애를 하면 다 랭보가 된다든?" 시인도 할 말이 있다. "걔하고 있으면 시가 막 써 져."
맞다. 청년을 만난 후 시상이 떠오르고 동인 품평회에서도 그의 시 변화에 동인들이 놀라움을 표한다. 동료 시인이 한 마디 한다. "요즘 사랑하나 봐?" 과연 시인의 사랑은 어느 쪽을 향할 것인가. 이 영화는 김양희 감독의 데뷰작이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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