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연인 - 박철

마루안 2016. 2. 1. 07:19



오래된 연인 - 박철



송추 가는 길
칠순 넘어 보이는 두 노인네가 러브호텔 앞에서 서성인다
영감은 '러브체어' 라고 허풍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현수막을 한번 올려다보고
할멈은 땀내나는 손수건을 꼬옥 움켜쥐었다
서로 먼 곳을 돌아와 낯선 곳에 선 두 사람
갈 햇살 너무 고운 모양이다 부끄러운 몸짓
영감이 조용히 손짓을 하자 할멈은 그의 뒤를 따른다


송추 가는 길
5.16이 나던 그해
멀리 전북 장수에서 면회를 온 바람난 처자와 새파란 이등병이
여인숙 앞에서 서성인다 나이 어린 처자는 손가방을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전구가 해사한 방에 앉아 두 연인은 다만
송추 오는 먼짓길과
돌아갈 먼 길을 인생의 그림자처럼 길게 길게 얘기한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 세월이었다
이제 홀몸이 되었으나 자식들은 모른다 지난 이야기를
늙어도 식지 않는 영혼의 풀죽을
기러기 날던 어느 날의 밤하늘을
숨차게 승강기가 올라가고 향기 짙어 깨끗한 방에
영감과 할멈이 놓여졌다
말을 잊은 두 사람
몸짓이 가벼우면서도 먼 기억처럼 느리다
할멈이 덜컥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을 때 영감이 먼저 몸을 씻었다
할멈도 냇가에서 나오듯 몸을 씻고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해는 중천인데
두 노인이 나란히 침대 위에 몸을 기댄 채
건너편 거울을 바라보며 잠시
서로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놓치기 아쉬워 그렇게 날이 지도록  앉아 있는
인연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 문학동네








인연 - 박철



80년대 초입, 오래 전의 일이다
글을 쓰겠노라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외로움과 싸우던 젊은 날이었다
어느 날 푸른 욕정을 참지 못하고
눈길을 내려와 인월에 이르러 하룻밤을 보낼 때였다
내려앉은 여인숙에서 여자를 하나 부르니
나이가 사십이 넘은 당시로선 중늙은이였다


낯설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하였으나
어렵게 나란히 누운 사이 주인이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검문이 나왔다는 것이다
여자는 혼비백산하여 방을 빠져나가고
내가 노루처럼 멍하니 지리산 쪽을 바라볼 때였다
주인이 돌아와 나를 이끌었다
저쯤 골목 끝에 여자가 있으니 그리 가라는 거였다
방문이 길바닥에 맞닿은 쪽방 하나가
여자의 거쳐였다 여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직 떨고 있었다


간단히 일을 마치고 여자는 뒤척였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입맛대로 들이닥치는 단속
가족이 알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대구 여자라는데
어찌하여 대구 여자가 전라도에 와 이런 일을 하느냐 물으니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들은 어리고 애들 아빠가 갑자기 차사고로 세상을 뜬 후
먹고살자고 이 일 저 일 해보았으나 빈 손짓
애들 아빠 친구들은 도와준다고 슬금슬금 가재미눈을 뜨고
얼굴 반반한 게 죄라서
당최 사내들이 가만 놔두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아이들 몰래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치다가
식당이며 공장이며 몇몇 일을 하다가 이리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전 무심했는지 한번 더 하라고 몸을 돌리면서
데모하다 도망온 학생이냐고 물었다


큰애가 공부를 잘해 겨울에 시험을 보는데
사관학교에 갈까 경찰대학에 갈까 고민중이니
어떤 게 낫느냐고도 물었다
둘 다 괜찮다고 말하며 몸을 내려올 때 문밖에서 호각소리가 들렸다
새벽녘, 잠이 든 그녀를 두고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모퉁이 구멍가게에서 계란 한 봉지를 사서
되돌아가 슬며시 문을 열고 들여놓았다
방문 소리에 잠이 깬 그녀가 아유, 이걸 뭘, 하며 몸을 일으키곤
밥이나 좀 끓여 먹고 가라고 손을 잡았다
첫차 타고 산에 올라야 한다며 돌아나오는데
아침 해가 까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경찰 간부가 되어 있을 그의 아들과
환갑이 넘었을 그니 생각을 하는 이 밤
그것도 내 사랑이었던지
쫓기듯 멀어지지 못하는 기억이 되어버렸으니
80년대 초입 어느 날의 일이었다





# 위 두 시를 인연이란 단어로 연결해서 읽는다. 다소 긴 시가 술술 읽히면서 마치 잘 짜여진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하다. 모든 추억은 돌아보는 훗날 이렇게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것인가. 흑백 필름에 담아도 좋을 시가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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